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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텔링’으로 역사의 무늬 조명 …“논문의 빈 공간 메울 수 있어”
‘다큐텔링’으로 역사의 무늬 조명 …“논문의 빈 공간 메울 수 있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2.18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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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문총’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의 비밀 파헤친 전호태 울산대 교수

▲ ‘고구려 고분 벽화’전문가인 전호태 교수는 틈만나면 답사를 떠난다. 그의 관심은 암각화에까지 뻗어있다. 지난 9월 12일 제주 광령리암각화 답사에 나선 전 교수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전호태>
전호태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는‘고구려 고분벽화’분야 연구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온 학자다. 기존의 문헌사 및 양식사 위주의 연구의 장단점을 지양·종합한 지성사적 연구 방식을 고분벽화 분석에 적용해 역사학계와 고고미술사학계로부터 새롭고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내놓은 연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가 14년 만에 고구려 고분 환문총의 벽화를‘역사 다큐텔링(다큐멘터리+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비밀의 문 환문총: 두 번 그려진 벽화의 진실은 무엇인가』(김영사 刊)를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環文塚’은 고구려의 한때 도읍지였던 중국 랴오닝성 集安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고분을 말한다. 대략 5세기 무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가 다른 고구려 무덤 벽화와 구별되는 점은, 애초에 그린 그림을 지우고 나중에 다시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먼저 그려진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흔한 일상생활 중심 소재지만, 나중에 그려진 그림은 온통 동심원문 형태다. 1935년 일본학자들이 처음 이 고분을 조사할 때 무덤방에 그린 이 동심원 무늬가 특징이라 해서 무덤 이름조차 동심원 문양의 무덤이라는 뜻으로‘환문총’으로 불렀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더 적절한 무덤의 명칭을 부여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 환문총은 흥미로운 유적이다. 벽화가 한 번 그려졌다가 모두 회로 덮인 다음 다시 완전히 새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먼저 그려진 생활풍속의 다양한 장면을 대신해 묘사된 것은 단순한 동심원문들이다!”그는 고구려 벽화를 처음 연구할 때 바로 이 부분에 시선이 고정됐다.“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다른 벽화를 새로 그려 넣게 했을까?”그의 머릿속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2001년 집필을 마친 뒤 2004년 출간한 한 책에서 환문총 벽화의 수수께끼에 대한 생각의 단편들을 잠시 풀어 놓았을 뿐,‘ 환문총 연구’로 잡았던 제목의 논문은 손도 못댄 채 시간이 흘렀다고 그는 술회한다.

2007년 봄, 전 교수는 생각을 고쳤다. 환문총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글을 쓰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그때부터 틈틈이 생각나는 대로 여러 형식의 글을 실험적으로 반복했다. 마침내 그는 환문총 관련 인물들의 시점별 이야기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글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벽화가 제작되던 고구려시대 사람들, 일제강점기 환문총이 발견되기 전후의 사회 분위기와 벽화고분 조사에 종사하고 벽화의 模寫를 시도했던 사람들, 해방 후 남북한과 중국에서 벽화 조사와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력과 실제를 섞어 이야기로 풀어 나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심인물은 국립박물관 미술부 학예사 한인규로, 저자의 경험과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이다.“ 1988년 여름, 덥고 습한 날씨와 씨름하면서 거듭되는 주경야독의 날들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로 시작하는『비밀의 문 환문총』의 서사구조는 고구려 고분 환문총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인규가 논문과 박물관 특별전 때문에 좀체 연구에 집중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중 대학 선배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해 온 1960년대 후반 출간된 책꾸러미 속에서 자신보다 먼저 환문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고태일 교수의 자료를 접하면서 환문총의 실체에 다가선다는 설정으로 돼있다. 가히 소설적 구상이라 할 수 있다.

전호태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미국 UC버클리대 및 하버드대 방문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암각화학회 회장,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벽화고분이 발견된 지 한 세기를 넘었지만, 이를 연구하는 데 평생의 헌신과 열정을 쏟아부은 학자는 동아시아 삼국 통틀어 전 교수가 유일하다. 이는 그의 저서 목록만 봐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2001년 제41회 백상출판문화상 인문과학 부문 저작상 수상작),『 울산 반구대암각화 연구』,『 고구려 고분벽화 읽기』,『 고구려 구분벽화의 세계』,『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등이 그가 그간 발표해온 책들이다.
이메일을 통해 전호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전문 》www.kyosu.net

△ 이번 책에서는‘고분벽화 다큐텔링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주제를 읽어내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팩트’의 한계 때문인가요.

“근본적으로는 자료의 한계 때문이지요. 사실 120기나 발견됐지만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벽화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20기 안팎입니다. 그나마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대다수지요. 벽화의 흔적만 있는 무덤들이 압도적 다수구요. 무덤이 언제 만들어졌고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글, 보통 묘지명이라고 하는데, 그런 글은 357년 제작 안악3호분과 408년 제작 덕흥리벽화분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외에 이 책에 잠깐 언급되는 모두루총에 묘지명이 있는데, 모두루총에 벽화는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환문총의 경우, 벽화가 두 번이나 그려졌지만 무덤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의도 때문에 벽화가 다시 그려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생활풍속을 담은 첫 번째 그림 위에 새로 그려진 동심원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한 형식의 벽화가 발견되지도 않았고요. 일종의 미스터리인 셈이지요. 이런 유적에 대한 역사적 설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연구논문은‘언젠가는 써야지’하면서 뒤로 미루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면서‘가능성’에 초점을 둔 글을 먼저 쓰게 된 거죠.”

환문총의 경우, 벽화가 두 번이나 그려졌지만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의도 때문에
벽화가 다시 그려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생활풍속을 담은 첫 번째 그림 위에 새로 그려진
동심원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한 형식의 벽화가 발견되지도 않았고요. 일종의 미스터리인 셈이지요.
이런 유적에 대한 역사적 설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연구논문은‘언젠가는 써야지’하면서 뒤로 미루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하면서 ‘가능성’에 초점을 둔 글을 먼저 쓰게 된 거죠

△ 오랜 시간 자료 수집과 고증에 힘쓰셨는데, 이와 관련 어려웠던 일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번 책이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좀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2007년부터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의식의 흐름을 좇는 방식으로 써 나갔습니다. 별다른 순서도 없이 책 속의 가상인물들이 수시로 등장해 유적과 관련한 생각이나 경험을 독백 형식으로 풀어냈지요. 그래서 초고에는 이 인물들이 시점에 관계없이 등장합니다. 고태일 같은 인물들이 한동안 나오다가 우에다니 아즈마니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문득 시간을 거슬러 호자스님의 삶이 펼쳐지는 식입니다. 필자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글쓰기여서 제3자가 보기에는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0년에 일단 초고를 완성했는데, 아는 이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했더니 혼란스러워서 안 되겠다는 거예요. 출판사에 맡길 수 없는 상태라는 거지요. 그 해 여름 미국 하버드대에 연구년으로 가서 조금 다듬는 시도는 했습니다만 더 이상 흥이 나지도 않고, 방향을 어떻게 잡아 어떻게 정리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아서 1년여 그냥 묵혀 뒀죠. 그러다가 출판사(김영사)와 접촉이 돼 전문편집자와 함께 가능한 원 상태를 유지하면서 시간별로 재정리하고 전체를 조망하는 글을 장마다 넣는 방식으로 수정하게 됐습니다.”

△ 강역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연구하기 어려운‘고구려 시대’와 같은 특정 시기를 이해하고자 할 때, 사실의 한계를 보완하는 다른 수단이 가능할까요.

“고구려 유적을 글쓰기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게‘가 볼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시기 조사보고서부터 시작해서 손이 닿는 자료는 모조리 정리하면서 기초적인 부분부터 확인하고 재정리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풀과 가위의 역사지요. 자료를 큰 모조지에 펼쳐 붙이기도 하고 떼기도 하고, 벽화는 부분적으로 트레싱(기름종이를 도판 위에 올리고 그림의 윤곽을 떠내는 방식) 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림을 잘 기억하게 되거든요. 제 초기 연구서의 선 그림은 거의 대부분 제가 직접 본 뜬 겁니다. 연꽃 그릴 때에 제일 공이 많이 들어갔지요. 이런 식으로 초기 작업을 한 까닭에 저는 벽화를 거의 외웁니다. 어떤 무덤, 무덤칸 안의 어떤 위치에 어떤 그림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정도는 대략 머릿속에 있어요. 머리가 특별히 좋기보다는‘절실함’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1991년 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됐고, 2004년에는 북한에도 가서 고분벽화를 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머릿속 벽화를 실물로 보는 그 느낌은 특별했어요. 그렇지만 몇 기의 유적 외에 다른 대부분의 고분벽화는 실물을 볼 기회가 없습니다.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않고요. 지금도 벽화는 계속 흐려지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태가 나빠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분벽화의 가장 큰 약점은‘기록’이 없다는 거예요. 연구상의 근본적인 어려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비교 연구 등의 방법을 씁니다만 여전히 한계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이번에 시도한‘다큐텔링’도 역사유적 이해의 한 통로로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대중과의 접촉에는 유효한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좀 서툰 맛이 있더라도 전문연구서가 지니는 고립적인 면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권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 고구려인들은 왜 환문총 벽화를 두 번 그렸던 것일까요.

“환문총 벽화는 실제 두 번 그려졌습니다. 처음에 고구려인이 춤추는 모습을 포함한 생활풍속의 여러 장면으로 벽이 장식됐다가 백회로 그 부분이 덮이고 새로 동심원문들이 그려졌지요. 높은 습도로 회 밑에 덮였던 그림이 밖으로 배어 나왔는데, 일제시기 조사 당시 발견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몇 차례씩 그림을 덧그리는 사례는 유적에서 여러 차례 확인됐습니다. 중국 돈황 막고굴 263굴 같은 경우, 5세기 북위시대의 여래 설법 장면이 11세기 서하시대에 회로 덮이고 그 위에 千佛圖가 그려졌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도 장천1호분의 관이 놓인 방 벽 상부에서는 회가 일부 벗겨지면서 원래 그려졌던 그림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무덤주인의 내세관이 바뀌면서 벽화도 다시 그려진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생활풍속은 고구려인의 전통적인 내세관의 표현이고, 동심원문은 아무래도 불교적인 깨달음을 나타냈다고 보입니다. 죽어서 조상신의 세계로 돌아가 귀족은 귀족처럼 산다는 생각에서 이 세상에서 쌓은 좋은 덕이나 악행이 내세에 어떤 세상에 다시 태어날지를 결정한다는 불교적 관념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어요. 환문총이 만들어질 때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사원도 많이 지어지고 스님도 많아서 중앙아시아 출신 스님들이 고구려에 왔다가 신라까지 내려갈 정도였습니다. 연꽃 그림이 벽화의 주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환문총 벽화가 다시 그려진 것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과 관련이 깊죠..”

△ 고구려 벽화 연구의 특수성이 있다면.

“벽화 연구는 까다로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선 벽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있어야 되고, 벽화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림’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연구 과정이나 결과가 선입견이나 특정한 의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중국에도 벽화 연구자가 여러 사람 있지만 ‘중원 미술과 문화의 영향’을 전제로 벽화에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고 중원미술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중국 고대 및 중세 미술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 받은 상태도 아닌데도 고구려 벽화가 받은 영향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구려 미술문화의 독자적인 발전과정 등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이지요.

벽화 연구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특수한 분야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나온 근래의 관련 연구 성과는 대다수가 문헌학자나 고고학자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서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접근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벽화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는데, 유적이 지닌 역사·문화적 맥락이 아예 무시되거나 고려되지 않은 상태의 것이어서 참고할 만하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북한은 이 분야 연구의 맥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벽화 연구를 위해서는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종교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훈련을 받는 게 우선적입니다. 국내에서도 벽화 연구자는 손꼽을 정도이고 수 년 이상 지속적으로 이 분야에 매달리는 이는 몇 되지 않습니다. 미개척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림 보기’가 출발이라면 이 분야 연구자가 되기 위한 별도의 훈련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려보기도 하고, 문헌학적 고증 능력도 갖추려면 연구양성 기관이 만들어지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 다양한 단행본을 상재해 오신 선생님 작업은 여러모로 시사적입니다. ‘연구업적평가’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번에 낸 제 책도 들인 노력이 적지 않습니다만,‘ 업적평가’로는 연구논문 한 편에도 비기지 못합니다. 각각의 기준에 근거는 있겠으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유치원 어린이용부터 전문연구서까지 다양한 형태의 책을 내려고 애써왔습니다. 처음에 잇달아 낸 어린이 책2권은 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과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썼는데, 초고를 딸에게 읽히면서 눈높이를 맞춘 탓인지 대중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아마, 여기서 동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만, 이후에 연령 단계별로 다양한 형태의 책을 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고분벽화’라는 우리 문화의 원형이자 가장 큰 자산을 우리 자신부터 잘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널리 알리는 방법의 하나로 대중적 글쓰기를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된 거죠. 새 책『비밀의 문 환문총』도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벽화 연구를 하면서 연구논문이나 연구서로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많습니다. 이번에 환문총 이야기를 내면서 이런 식의 글쓰기로 빈 부분을 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다른 작업들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의 2장, 4장을 열린 상태로 마무리 한 것도 다음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고구려-신라 사이에 얽힌 이야기,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의 무대에 대한 글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전문연구와 대중적 글쓰기를 계속 병행하고 싶습니다. 벽화고분별 연구서 한 권과 벽화고분 자료집 한 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환문총 글쓰기를 통해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만, 초고 상태 글을 좀 묵혀 두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전문연구 결과를 묶어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두고 다듬으면서 보완되는 내용도 적지 않으니까요. 유적·유물도 좀 더 자주 보러 다닐 생각입니다. 그 앞에 머무르는 시간도 더 늘이려고 합니다. 점점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서두르는 일이 줄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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