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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 고구려에서 독도까지, 영원의 뿌리 찾는 한국화가 이종상 교수
지면으로의 초대 : 고구려에서 독도까지, 영원의 뿌리 찾는 한국화가 이종상 교수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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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3:57:03

서울대 박물관에서는 지난 10일부터 이종상 서울대 교수(동양화)의 ‘독도 展’이 열리고 있다. 제2회 ‘역사와 의식, 독도진경’ 특별전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달 말 미술사가인 김홍남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와 한국무용가인 이애주 서울대 교수(무용) 외에 10명의 초대 작가들과 함께 독도를 다시 다녀왔고, 이제 그 작업을 펼쳐보이는 참이다.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주제는 온통 독도이다. 그는 왜 독도를 그리는 것일까. 화가인 그에게 독도는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인가. 그는 “내가 꿈꾸는 독도는 정치적 영토로서의 독도가 아닌 우리 문화 속 영토인 독도입니다. 한국의 얼과 혼을 찾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내게는 고구려와 독도가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고구려에서 한국인의 첫 얼을 발견하고, 독도에서 끝 혼을 발견했다는 이종상 교수는 삽십 년 넘도록 진짜 한국화를 찾아온, 가장 한국적인 화가이다.

“독도가 거기 있으니 그곳에 가는 것이고, 독도가 우리 산하이니 우리가 그릴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그림이 있는 곳이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생을 살아왔다. 그때만 해도 다들 쉬쉬했던 고구려 벽화를 그리기 위해 평양까지 다녀왔고, 서슬 퍼렇던 1960년대에는 고구려벽화 운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의 가택수사까지 받았다. 그가 찾아 헤매는 고구려가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와 무슨 관련이 있지 않느냐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유였다. 고구려를 이야기하면, 그것이 민족이든 예술이든 무조건 ‘불온사상’으로 의심받는 시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미술의 근원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의 믿음에는 변함없다.

“겸재 정선의 진경 정신을 찾기위해 전국을 누비며 진경 여행을 다녔는데, 심심찮게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서 우리 예술작품 속 독도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독도 진경’이 없는 거에요. 그때 느낀 것은, 사명감이란 말이 맞겠죠. 그렇게 해서, 독도를 찾은 첫 화가가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독도의 새벽에서 그는 비로소 ‘신이 완성한 이 땅의 마지막’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려야 할 그림의 끝을 본다.

“새벽 안개를 뚫고 느닷없이 물위에 솟아오른 고래등 그림자. 한 개인가 하는 순간 어느 새 두 개로 갈라서면서 그 사이로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달려든다. 가슴 치는 이 흥분. 걷잡을 수 없는 감격에 미친 듯이 먹을 갈아 화선지에 담아 본다. 우리 땅 독도를 화가로서는 최초로 화폭에 담는다는 이 흥분. 신은 정녕 독도를 끝으로 이 조국 강산을 완성했는가!” 정확히 1977년 3월 15일. 바로 그 날, 독도 일출을 목격하며 처음으로 그림에 담고 돌아와 감격에 겨워 썼던 글에 그날의 감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과하게’ 우리 것에 집착하는 지도 모른다. 서양화를 공부하다 동양화로 전공을 바꾼 것하며, 이왕 동양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사상적 뿌리부터 깊이 있게 하자는 생각에 동양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딴 열의도 그렇다. 그런데, 그 철학공부가 관념의 성을 더욱 두텁게 쌓는 계기가 아닌, 틀을 깨고 벽을 부수는 계기가 된 것 또한 모순이다. 그가 찾아 헤맨 진경은 화첩에서만 들여다보는 진경이 아닌, 궁극적으로 자연과 인간과의 진정한 만남이다. 자연의 생성과 우리의 삶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교감과 동화의 ‘진짜 진경’을 찾기 위해 그는 전국을 누비고, 철학을 공부하고, 고뇌의 길을 자처해서 걸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잡식성의 걸구가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한국의 ‘얼’이라는 영양소가 들어있는 것이면 찬밥 더운밥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웠다. 남들은 이러한 전천후 먹성에 대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서양 것으로 길들여지기를 강요당해 왔던 풍조 속에서 내 것에 대한 배고픔은 그만큼 더 절실했다.…예술이 삶보다 더 위대하고 높은 곳에 있지 않음도 알았다. 이 세상 모든 예술은 사람다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예술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내가 그려오고 또 안다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내 ‘얼꼴’을 찾는 데 훼방이 되고 있었는지를 알았다.…내 얼굴에 확신이 서는 날, 나는 또 우리의 얼굴을 찾아서 떠날 것이다. 나의 그림(꼴) 속에서 나의 ‘얼’이 민족의 ‘얼’과 만나야 된다는 확신을 갖고 영원한 미완의 미학을 향해, 사람다움을 위하여….”

그는 삼십 년의 치열한 고뇌를 거쳐 벽돌을 하나 하나 무너뜨리고 비로소 자신의 맨 얼굴에 조그마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제 내 눈에는 나무도 들도 숲도 산도 모두 투명한 유리처럼 내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 겹겹의 유리 속의 한의 맥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져진다”는 그의 독백이 예술가로서 평생 눈을 가리고 머리를 흩트리는 모든 미망의 것들을 떨쳐냈다는 오만함으로 들리지 않는 것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금도 미완의 미학을 위해, 나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을 찾기 위해 고구려에서 독도까지 그 먼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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