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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遷이 만든 여인들의 운명 … 그 목숨 건 생존방식의 당당함 앞에서
西遷이 만든 여인들의 운명 … 그 목숨 건 생존방식의 당당함 앞에서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12.10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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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7. 사막이여, 안녕! 반갑고야, 파미르!―서쪽으로 간 월지의 행방(2)

 

▲ 파미르의 눈길. 사진 장영주 KBS PD

상한 영혼을 위하여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 고정희(1948∼1991)

11월이 가고 12월이 온다. 한 해가 가는 시점에 가슴 찡한 시 한 편 읽지 않을 수 없다. 근래 몸이 전만 못함을 느끼며 정신도 늙어감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가기로 마음먹으니 지는 해가 문제인 듯했다. 그런데 어느 시인은 나와 다른 생각으로 삶을 대했다. 목숨 걸고 감행하면 시간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숙연해졌다. 그는 나보다 먼저 와 나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게으름은 핑계를 필요로 한다. 그래, 가야 하면 목숨 걸고 길을 나서야

 한다. 해 지고 날 저물어 밤이 된다한들. 외로움은 이내 익숙해진다. 밤길은 의외로 걷기에 즐겁다.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낯선 곳을 찾아야 하는 인간의 비극을 월지의 西遷―그러나 어디 월지뿐이랴!―에서 우리는 목격했다. 모세(Moses)의 인도로 가나안(Canaan)을 향하는 유대인들의 엑소더스(Exodus, 출애굽)는 최근까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월지는 잊혀진 존재. 험준한 파미르를 넘었을 그들의 행로를 이번 글에서도 더듬어본다. 가도 가도 끝없어 보이는 험로에 지쳐 중도에 산간마을을 이루고 정착했을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 여기저기 산중에 혹은 산간 계곡에 흩어져 사는 동족을 통합해 파미르의 소왕국을 건설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는 무리 중에는 당연히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전부터 살아온 생활방식을 고수했을 것이다.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사노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을 것이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부족한 형편에 농사를 짓는 노동력으로 여자와 아이들은 무척 중요했다. 과거에는 사람의 숫자가 부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여자의 덕목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정이 이와 같은, 즉 한 여자가 형제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윤리와 도덕은 시대적, 자연적 환경의 산물인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시대와 자연 환경의 산물
천하의 나폴레옹은 ‘여성의 역할은 침대와 가족, 교회에 한정돼야 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믿음이나 인식에 불과할 뿐. 실제는 믿음대로 되지 않는다. 생전에 그가 황후 조세핀에게 쩔쩔 맸다고 전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폴레옹과 유사한 사고방식이 현재에도 존재한다. 파미르 고원 너머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은 물론 중동지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역시 여자는 애 낳고 살림 하는 외에 별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학이 상책이라고 믿는다. 이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의 반영이다. 이런 탐욕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위해 그들은 뿌르다(purdah, 여성의 사회적 격리)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여자의 공간은 오직 집안에 국한될 뿐, 돈 벌고 외부의 적과 싸우는 따위의 힘든 일은 남자가 다 한다. 그러니 군말이 있을 수 없다. 여자가 부득이 바깥출입을 하려면 부르카(burqa)와 같은 쓰개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감싸야 한다. 내 것은 그 누구에게도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는 남성의 욕심과 질투심의 극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선지자 모하메드의 지침(?)에 따라 일부다처를 수용하고 있는 이런 무슬림들이 한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와 더불어 사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新唐史』 西域傳은 읍달국(挹怛國)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읍달국은 한나라 때 대월지의 종족이었다. 대월지가 오손에게 빼앗겨 서쪽으로 大宛 지나서 大夏를 공격해 신하로 삼았다. 치소는 藍氏城이었다. 대하가 곧 吐火羅다. 엽달(嚈噠)은 王姓인데 후손들이 성으로써 나라(의 이름으로) 삼았고, 그것이 와전돼 읍달이 됐으니, 읍전(挹闐)이라 부르기도 한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하다. 천보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읍달은 흔히 백흉노로 알려진 Hephtal을 가리킨다. 이 에프탈이 대월지의 한 갈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월지는 본거지를 떠나 일시 천산북안의 이식쿨을 점거했다가 다시 오손에게 패해 서쪽의 대완을 지나 아무다리야 강 남쪽의 대하[=토화라]를 신하국으로 삼았다고 당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월지라는 부족연맹체에는 쿠시(혹은 카시) 외에 읍달(에프탈)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허나 읍달은 역사적으로 후대에 등장하는 세력이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월지의 갈래는 王姓이 溫인 이른바 昭武九姓, 달리 말해 九姓昭武다. 이들은 힘든 이주의 노정을 트란스옥시아나의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하는 것으로 마감하고 그곳에서 반농반유목생활을 시작한 과거 기련산 昭武城 출신의 월지민이다. 이들이 세운 나라로 시간 여행을 떠나 한참을 지나고 보면 현대에 이르러 그 영역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쫓기는 월지의 갈래는 가는 길이 저마다 달랐다. 쿠시의 무리 대다수는 천산 이남의 오아시스 지역을 경유해 파미르를 넘었다. 후일의 에프탈과 소무성 출신 월지는 일리초원을 거쳐 이식쿨과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마침내 남쪽으로 아무다리야강을 넘어 대하까지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
옛 기록에 월지의 한 갈래인 엽달의 이채로운 풍속이 전한다.
“읍달국의 도읍은 烏滸水(아무다리야 강) 남쪽 200여리 되는 곳에 있다. 대월지의 종류에 속한다. 정예병사가 5천∼6천 명이며, 전투에 능하다. 과거에 나라가 혼란했을 때 돌궐이 字를 詰强이라고 하는 通設(‘통’ 즉 ‘호랑이’라는 이름의 shad)을 보내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도성은 사방이 10여리이고, 寺塔이 많은데 모두 금으로 장식했다. 형제가 부인을 같이 둔다. 한 사람의 남편을 갖는 부인은 뿔이 하나 달린 모자[一角帽]를 쓰고, 형제 여러 명을 남편으로 둔 사람은 그 숫자에 따라 뿔을 만든다. 남쪽으로 漕國과는 1천500리, 동쪽으로 과주와는 6천500리 떨어져 있다. 대업 연간(605∼618)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같은 취지의 기록이 『周書』 異域傳 下 第42 엽달국(囐噠國)條에도 보인다.


“엽달국은 대월지와 같은 종류이며, 우전의 서쪽에 있고, 동쪽으로 장안과 1만100리 떨어져 있다. 그 왕의 치소는 拔底延城인데 대저 王舍城이다. 그 성의 방은 10여리다. 형법과 풍속은 돌궐과 대략 동일하다. 그 풍속도 형제가 하나의 부인과 동시에 혼인한다. 대저 형제가 없으면 그 부인은 뿔 하나 달린 모자를 쓰고, 만약 형제가 있으면 그 수의 다소에 따라 뿔을 단 모자를 쓴다. 그 사람됨은 흉한하며 전투에 능하다. 우전과 안식 등 대소 20여 국이 모두 그들에게 복속하고 있다.”
월지의 풍습이 이랬다. 현재를 살아가는 남자들이 손사래 치며 마다할 일처다부제가 월지에서는 자연스런 습속이었던 것이다. 이 습속이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생존방식이었던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남편의 수에 따라 착용하는 모자의 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 명의 남편을 둔 행운(?)의 여성은 모자의 각을 열 개나 함으로써 본인의 인기 있음을 과시했을 것이다.

사서에 전해지는 일처다부제 월지의 풍습
이런 通室의 풍습은 월지의 한 갈래인 읍달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다. 오손인도 그랬지만 대하인도 이와 유사한 혼인풍속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여기 여자들은 남편의 수대로 목걸이에 뿔을 매달았을 뿐이다. 남편의 수는 아마도 인기에 비례했을 것이다. 인기가 미모인지 다산가능성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 전통 의상을 입고 염소젖을 짜고 있는 파미르의 아낙. 혹 월지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北史』 서역전 第85 吐火羅國 條가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화라국의 도읍은 총령에서 서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고, 읍달과 잡거하고 있다. 도성의 방은 2리이고 병력은 10만 명이며 모두 전투에 능하다. 그 풍속은 불교를 신봉한다. 형제가 한 명의 부인을 같이 하고 번갈아 동침하는데, 한 사람이 방에 들어가면 문 밖에 그 옷을 걸어서 (동침의) 의사를 표시하며, 아들을 낳으면 그 형에게 속한 것으로 여긴다. 그 산의 굴에는 神馬가 있어 매년 굴이 있는 곳에 말을 놓아기르면 반드시 좋은 망아지[名駒]를 출산한다. 남쪽으로 조국과 1천700리, 동쪽으로 과주와 5천800리 떨어져 있다. 대업 연간(605~618)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풍습이 곤륜산맥 이남의 티베트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운남성과 사천성의 경계를 이루는 루꾸호 일대에 거주하는 모쒀족도 이와 비슷하면서 한편으론 남다른 혼인풍습을 지니고 있다. 아마 이들이 혈통적으로 상호 관련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종족 간 문화 융합의 결과 때문일 수도 있다. 모쒀족은 다름 아닌 소[牛]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의 소는 털 긴 야크를 말한다. 야크와 더불어 유목생활을 하는 집단은 비슷한 혼인습속을 공유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소를 소라고 부른다. 전편의 글에서 말했듯, 티베트인들도 소(야크)를 소(혹은 속)로 부른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세상에 우연은 없다 했는데.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생활환경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기는 가축들이 다르다. 몽골 사람들에게 주요한 가축은 양, 염소, 소, 말, 낙타 등이다. 몽골어로 양은 ‘호니(honi)’, 염소는 ‘야마(yamaa)’, 소는 ‘우헤르(¨uher)’, 말은 ‘모린(morin)’ 혹은 ‘아도(aduu)’, 낙타는 ‘테무(temu)’라고 한다. 서양학자들의 해석과는 달리 칭기즈칸의 아명 ‘테무진’의 의미는 ‘대장장이(ironmaker)’가 아니라 ‘낙타돌이’다.


티베트인들에 의해 야만인 취급 받으며 ‘소’라고 불린 몽골인들은 소를 ‘우헤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말은 몽골말과 필연적인 친연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말의 계통은 어디일까. 우리말은 우랄알타이어족 퉁구스어계에 속한다고 배웠다. ‘퉁구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퉁구스인은 시베리아 동부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몽골인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퉁구스인에 대한 최초의 기술은 1612년 네델란드 상인이자 여행가 아이작 맛사(Isaac Massa)에 의해 이뤄졌다. 막스 뮐러(Max Muller))에 의하면 퉁구스라는 말은 ‘사람’을 뜻하는 퉁구스어 ‘donki’에서 왔거나, ‘돼지’라는 말 ‘tungus’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東胡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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