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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즐거움'
앎의 '즐거움'
  • 교수신문
  • 승인 2014.12.0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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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 방만호 편집기획위원
최근의 내 일은 학생들과 함께 이상 소설을 읽고 또 그것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한데 모아 책이 됐으면 좋겠다고 혼자 꿈을 꾸고 있다.

이 이상이라는, 스물여덟 살에 요절한 천재는 상대하기가 만만찮다. 이 만만찮음은 물론 그는 드높은 정신세계의 소유자여서 세계문학의 전통들에 대해 치열한 대결의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도스토옙스키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19세기에 태어나 19세기에 세상을 떠난 이 작가는 자신의 시대를‘현대’라고 믿었고, 이‘현대’의 전위가 되고자 했다. 그의 문제작「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보면, 번번히 19세기 운운, 유럽적 교양 운운, 러시아적 불철저성 운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은 이 도스토옙스키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하면서 20세기 초입에 태어난 사람답게 자신의 현대인 그 20세기의 전위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만만찮은 일인가. 지식의 최전선에 서는 일만큼이나 문학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매번 새로움을 선보여야 인정받는 현대문학의 생리는 그를 더욱 괴롭게 했을 것이다.

문제적 인간은 그 괴로움을 즐거운 고통으로 수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태백, 도스토옙스키, 고리키, 모파상,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쟁쟁한 실력가들과 다투면서 그는 자신만의 득의의 영역을 개척하려 했고, 그‘개세의 경륜’을 다 펴지 못한 채 천재답게 요절했다.

바야흐로 그의 말년작「종생기」를 또 한번 보고 또 보며 식은땀이 난다. 과연 내가 잘 봤었느냐는 말이다. 아니, 이런 의미도 있었잖느냐 말이다. 하, 그의「날개」와「종생기」에는 피로 얼룩진 프로혼이 스며들어 있지 않더냐 말이다.

그러니「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이들 작품과 대조해서 정밀하게 읽어내지 않을 수 없는 까다로운 국면의 연속이다. 남이 이미 했다 해서 내 것이 아니요, 얼마든지 새롭게, 그리고 보태면서 할 수 있는게 문학 쪽의 연구다.

밤이 늦으니 어지간히 피로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괴롭히는 책이 있다. 플라톤의『향연』이다. 연구실 서가 어디쯤 꽂혀있는 것을 찾아볼까 말까 계속해서 망설여온 것이다. 드디어 오늘은 마음을 굳히고 찾아보는데, 어럽쇼, 금방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읽다 만 부분부터 다시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마침 잘 됐다. 정암학당인가에서 펴낸 이 책, 참 야무지게도 만들었다. 앞에 해설이며 구성체계 설명도 자세하고 번역은 공을 들였고 뒤에 주석 또한 상세하기 이를 데 없다.

해설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도자는 그를 앎들의 아름다움으로 이끈다. 이 아름다움의‘큰 바다’를 향해 가서 아름다움 일반을 관조하게 됨으로써 웅장한 이야기와 사유를 낳게 된다. 거기서 더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갑자기’아름다움 자체 혹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직관하는 어떤 단일한 앎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단계들을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차례차례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아름다운 것 자체를 직관하게 된다.”

플라톤의『향연』은 분명 에로스, 사랑과 미에 관한 책이건만, 이에는 반드시 그 높은 곳에 앎에 대한 사랑, 앎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리하여『향연』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몸의 사랑에서 마음의 사랑으로 움직여가며 이 마음이, 몸이 자손을 잉태하듯 잉태하는 지식과 지혜, 분별의 힘으로 이 세계를 불사의 것으로 만든다.

책을 잠시 덮고 생각한다. 성실하지만은 않더라도, 부지런하지만은 않더라도 앎의 과제를 안고 그 길을 갈 수 있음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잠시 후 나는 다시 이상의「종생기」로 눈을 돌린다. 이 작자는 방불한 것을 꼭‘彷彿’이 아니라 ‘髣髴’로 쓰고, 目睫이니, 瞑目이니, 瞠目이니 하는 말을 써서 읽는 사람의 앎의 수준을 시험한다. 즐거운 고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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