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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章은 正價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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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 승인 2014.12.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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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 장유승 서평위원
1832년 冬至使書狀官의 자격으로 북경에 가던 金景善은 북경으로부터 3백여 리 떨어진 沙流河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마침 장날이라 길 양쪽에 가게가 열려 온갖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 복잡했지만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물건에 정해진 가격이 있어서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치열하게 가격을 흥정하는 조선의 시장 풍경에 익숙한 그에게는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더러남아 있는 걸 보면, 나름대로 상업이 발달했다는 조선후기에도 정가제는 시장에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던 듯하다.

 

경제사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조선의 시장에 정가제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를 함부로 논할 수 없다. 다만 불확실성을 기피하는 것이 경제의 속성이니만큼, 불확실한 가격이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리 만무하다. 제아무리 수요 공급에 의한 가격 변동이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라지만, 예측불가능한 가격 변동은 시장참가자들에게 큰 위험부담이다. 동시기 중국과 일본의 사정에 비춰보아도, 정가의 부재가 조선의 상업 발달을 저해한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장사가 속임수라지만, 장사를 잘 하려면 기본적으로 신뢰가 있어야 한다. 특히 정가에 대한 신뢰는 필수적이다. 구매자는 판매자가 물건의 값어치에 적절한 이윤을 붙여 내놓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판매자는 구매자가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정가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구매자는 무조건 값을 깎으려 할 것이고, 판매자는 이를 예상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거나 품질이 나쁜 물건을 내놓을 것이다. 정가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무의미한 시장의 폐해가 바로 이것이다.

한때 중국에서 물건을 사려면 부르는 값에서 무조건 반을 깎아야 한다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정가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예전처럼 깎아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본이야 가격을 깎아주지 않기로 정평이 난지 오래다. 반면 우리는 파는 쪽도 사는 쪽도 정가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시장에 가면 여전히 값이 써 있지 않은 물건이 많다. 소비자가 재래시장보다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차라리 조금 더 비싸게 살지언정 조금 더 싸게 사려다가 터무니없이 비싸게 사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손바닥만한 재래시장이야 그렇다 쳐도, 거대한 백화점에서조차 정가는 유명무실하다. 1년 내내 세일 중인 백화점에서 정가대로 물건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할인이 일상이 된 탓에 정가를 무시하는 소비자도 문제지만, 한철 장사로 한몫 잡겠다는 판매자의 욕심이야말로 정가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피서철이나 특별한 날이면 정가는 자취를 감춘다.

‘단통법’이 시행되면서 모든 소비자들이 같은 물건을 같은 가격으로 구입하게 됐다. 정가제가 확실히 자리 잡은 셈이다. 그렇지만 소비자는 여전히 불만이 많다. 정가를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조사가 정한 휴대폰 가격과 이동통신사가 정한 통화요금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가의 타당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제조사와 이동통신사는 영업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한다. 과점 상태인 통신시장에서 정가의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가제는 소비자에게 이득이 될 수 없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됐다. 단통법에 데여서 그런지 소비자들은 불만이 많다. 제2의 단통법이라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물론 도서정가제를 옹호하는 쪽의 입장은 다르다. 출판시장은 과점 상태의 통신시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도서정가제는 가격 경쟁을 막아 중소출판사와 동네서점을 살릴 것이며, 심지어 장기적으로 책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보니, 책값의 거품을 빼겠다는 취지가 무색하게도 출판사들은 가격을 낮출 여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최소한의 마진만 남기고 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수긍할지는 의문이다. 기실 도서정가제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은 책값을 깎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값이 애당초 터무니 없이 높게 책정됐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도서정가제 역시 단통법과 마찬가지로 정가의 타당성에 대한 고려가 없는 듯하다.

唐宋八代家의 한 사람인 歐陽脩가 말했다.
“문장은 정교하게 다듬은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아서 시장에 가면 정가가 있는 법이니, 사람들이 입과 혀로 값을 높이거나 낮출 수 없다.”

책값은 출판사가 결정하지만, 그 타당성은 독자가 판단한다. 도서정가제의 성패는 정가의 타당성에 대한  수많은 독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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