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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학살' 부른 대학생 시위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준 상처들
'초유의 학살' 부른 대학생 시위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준 상처들
  • 박남기 광주교대·교육학
  • 승인 2014.12.01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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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_멕시코 학생운동의 흐름①

멕시코에서 일어난 43명의 대학생 학살 사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발생한 맥락이나 멕시코 고등교육에 대한 국내의 이해는 낮은 편이다. 박남기 전 광주교대 총장이 멕시코 학생운동의 흐름을 짚은 글을 보내왔다. 8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눠 2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이 사건은 지난 9월 26일 멕시코 서남부 게레로 주 이괄라 시에서 80여 명의 교육대학 학생들이 정부 지원 삭감 반대, 임용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시작됐다. 지역 교사(지역 사회운동가)를 기르고 있는 이 대학은 지역의 소작농과 일용 근로자들을 돕는 역할도 해오고 있었다.

이 지역 경찰은 자신들과 유착 관계가 있는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갱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해 학생 6명을 숨지게 했다. 이와 함께 갱단은 시위 참가자 43명을 납치해 모두 살해했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 2013년 5월 30일 비료 지원을 요청하는 시위대 지도자를 포함한 3명을 납치해 살인한 사건도 발생해 이미 유사 사건 발생 가능성이 예견되기도 했었다.

구속된 시장 부부와 물러난 주지사는 야당인 민주혁명당(PRD) 소속이다. 게레로 주의 시장 12명이 마약조직과 연계돼 있는데 그 중 8명이 민주혁명당 소속으로 밝혀졌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은 더 이상 믿을 곳이 없다는 상실감에 빠지게 됐다. 이번 사태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어서 이번 사태가 멕시코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보지만 과거학생 학살 사건 이후의 경과를 살펴볼 때 썩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가장 큰 대학생 학살 사건은 1968년 발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해 온 멕시코는 1960년대‘멕시코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근대화를 이룩했고 이 결과 1968년 중남미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됐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앞둔 7월 27일 쿠바혁명 지지와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수십 명의 대학생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당하자 다음날 수백 명의 학생이 폭력 경찰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산됐다. 경찰의 진압이 더욱 강화되자 8월 1일 멕시코국립대 총장과 8만여 학생이 반정부 민주화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 이후 중고교 교사, 일반시민, 산업별 노조까지 참가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진압군이 멕시코국립대를 점거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1968년 10월 2일에 멕시코 역사상 초유의 학살 사건이 자행됐다. 뜰라뗄롤꼬(tlatelolco) 광장에서 시위 중이던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 가운데 수백 명이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진압 작전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통계는 불확실하지만 이 사건은 현재까지 멕시코 역사상 최악의 집단학살사건으로 남아있다.

우덕룡은 6·8 학생운동 촉발 원인으로 △새로운 사회 집단의 요구를 대변할 정치적 제도부재, △국가와 대학 간의 관계 악화, △경제성장 혜택의 사회 상층부 집중, △서구 다른 국가의 신세대 반항 영향 등을 들고 있다. 6·8 학생운동 이후 국립대는 친야 세력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71년간 지속돼오던 멕시코의 일당 독재는 2000년 빈센트 폭스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종식됐다. 그는 학살자 처벌을 내세우며 당선된 후 특별검사팀을 구성했다. 2002년 대법원이 행방불명과 관련된 책임, 학살 책임은 시효가 없다고 판시함으로써 1968년의 대학살 사건을 조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멕시코 정부는 1968년 대학살 사건 희생자 추모비를 뜰라뗄롤꼬 광장에 건립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8년에는 국제앰네스티가 나서서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에게 뜰라뗄롤꼬 대학살의 배후규명, 모든 관련 공문서와 기록 공개, 독립적인 수사 시작, 범죄 책임자들에 대한 법의 심판,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보상을 촉구했다. 하지만 학살을 감행했던 정권과 뿌리를 같이하는 제도혁명당(PRI)이 2012년 재집권함에 따라 진실규명은 다시 뒤로 미뤄지게 됐다.

이 사건과는 별개지만 1971년에도 학생 68명을 죽인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정부에 대항하던 수백 명의 좌파들이 살해당하거나 실종된 10여 건의‘더러운 전쟁’가운데 하나다. 2004년에는 이 학살 명령자로 기소된 루이 에체베리아(Luis Echeverria) 대통령(1970~76)과 관료들도 다루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05년 3월 멕시코 대법원이 대학살사건에도 30년 시효가 적용된다고 결정함으로써 다룰 수 없게 됐다. 이처럼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결과 학생 학살 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남기 광주교대·교육학과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박사를 했다. 광주교대 교수협의회장과 총장을 지냈고, 현재 (사)희망네트워크광주 이사장, (사)한국교육정책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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