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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 1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던 인문학
<연재기획>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 1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던 인문학
  • 최종덕 / 상지대·자연철학
  • 승인 2000.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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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자연과학의 원리와 방법이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번호부터 우리신문은 인문과학에 응용되고 있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격호에 걸쳐 점검해 본다.

뉴턴 고전역학의 특성은 초기조건이 주어질 때 미래의 모든 사건의 양상을 완전하게 결정하는데 있다. 이러한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체계는 (1)관찰대상과 관찰자와의 독립성, (2)물리세계를 시계와 유비하는 환원주의, (3)과거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절대적 시공간성, (4)운동변수를 수학화된 환산질량(Reduced Mass)으로 보는 보편적 결정론이다.
반면 양자역학은 뉴턴역학과 전혀 다른 상황을 낳는다. 양자론은 환원과 결정이 아닌 확률의 파동함수로서 미시계의 양자현상을 기술한다. 이 점은 물리적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태도의 변화를 요청했다. 닐즈 보어(Niels Bohr)를 따르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물리상태에 대한 결정론적 미래예측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미래의 물리상태를 관찰자와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야머(Max Jammer)는 닐즈 보어의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관계성과 전일성(Ganzheit)으로 정리했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성이란 측정장치와 대상의 상호적 관계, 즉 관찰자와 피관찰체가 독립적일 수 없으며, 상호작용의 결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또한 개체적 원자론이 무너지고 피관찰 대상과 측정장치는 하나의 비분화적인 전체를 구성하며, 국소적 물리계 대신에 비국소적 통일계를 상정하는 것이 바로 보어의 실재관이었다. 이러한 양자현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보편의 신화가 무너지고, 우리는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성과 전일성의 세계관을 열어 놓은 자연철학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됐다.
전통적으로 실재(reality)에 대한 기술은 인식주체와 독립적이며, 당연히 인식주체의 행위와는 별개로 논의돼 왔다. 그러나 양자론에서 말하는 실재에 대한 기술은 관측장치와 관찰행위, 즉 지금 실현되고 있는 구체적 행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물리실재에 대한 현상적 기술을 일상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점은 코펜하겐학파의 가장 큰 난제였다. 생체조직에 대한 실험 과학탐구를 예로 들어보자. 살아있는 피부조직을 떼어내어 염색을 한 다음 현미경의 대물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조직을 떼는 순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가 돼버리는 언어적 자기충돌을 일으킨다. 이 사례가 바로 양자현상 기술의 어려움과 같다.
우리가 하는 과학탐구는 결국 죽은 세포를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추상화의 작업을 전제해야 한다. 이를 과학탐구의 ‘이상화’(idealization)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화는 세계와 언어 사이의 괴리를 그냥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사실 철학에서는 양자역학과 관계없이 이미 이런 문제들을 매우 심각하게 다루어 왔는데, 바로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정지돼 있고 객관적이라고 하는 실체론 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운동하고 관계론적이고 유기체적인 과정철학의 패러다임으로 철학의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실체론의 경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서구 이성을 반성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2)이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에 이어 (3)합리성으로 규준화된 질서를 뒤집어서 역사와 신화의 회화를 다시 그리려는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의 과학철학과 (4)제도화된 모든 이성적 구축물들을 강하게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의 철학으로까지 연계돼 왔다. 이러한 철학적 흐름의 변화는 니체의 열기를 회생시켰으며, 뉴턴의 실체론적 자연철학에 가려졌던 괴테의 파동적 사유마저도 되살아나게 하는 힘을 실어 주었다.
이때부터 포스트모더니티의 인문학적 개별 주제들은 양자론의 힘을 얻어 상대주의 과학을 조금씩 인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틈을 타서 문화적 사생아인 신과학운동은 과학을 완전히 상대화해 아전인수의 과학해석을 하면서, 과학의 환상을 신비주의에 직접 접목시켰다. 그리고 많은 미래학자들까지도 과학의 희망과 과학의 현실을 혼동한 채 화려한 수사학을 쓰게 되었다. 또한 정통학문이라고 자처하는 실증주의 인문학이 과학방법론을 남모르게 오용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렇게 아전인수의 과학 인용의 열기는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과학론자에게 너무 쉽게 덜미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소위 ‘과학전쟁’이라는 것이 불붙었다. 원래 과학전쟁의 당사자들은 잘 나가는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화살을 쏜 것이었고, 그것도 지나친 비난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엘런 소칼의 반란이 휘두른 보편의 칼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보수적 보편성의 과학이 어수룩한 인문학을 치고 빠지면서, 포스트모더니티 경향의 인문학은 온갖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전쟁의 논쟁을 떠나서 인문학이 과학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 혹은 인문학이 보편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를 따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티 과학을 메타포로 도입한 다양한 인문학적 글쓰기의 이유는 인간에 대한 수학적 해답을 구하거나 과학의 권위를 등처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됨의 인류학적 원천을 질문하는데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과학전쟁의 수모에 연연하지 말고 사람됨의 구체성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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