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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 원로 獨文學者의 작업이 주는 네 가지 의미
83세 원로 獨文學者의 작업이 주는 네 가지 의미
  • 서장원 고려대·독일문화학과
  • 승인 2014.11.25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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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준 교수의 『두이노의 비가』 번역에 부쳐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두이노의 비가』(열린책들, 496쪽, 12,800원)가 원로 독문학자 손재준 교수에 의해 번역 출판됐다. 『두이노의 비가』는 1899년부터 1922년까지 발표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여덟 권(『기도 시집』, 『형상 시집』, 『신 시집』, 『후기 시집』, 『진혼가』, 『마리아의 생애』,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두이노의 비가』)에 수록된 시 중 170편에 이르는 작품을 선정한 시 선집이다.


릴케 만년의 대작인 『두이노의 비가』 번역은 성악으로 치자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밤의 여왕’ 소프라노 기교에 비견된다. 전 세계에서 ‘밤의 여왕’ 아리아를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소프라노는 단지 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만큼 소화해 내기가 어렵다. 음이 제대로 올라갔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던 청중의 황홀감이 박수가 돼 환호로 터져 나오는 부분이다.


손 교수의 번역이 주목받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그 연세에 그러한 책을 내셨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호적상 1932년 생으로 올해 여든 셋 된 우리의 어른이시다. 두 번째는 드디어 책을 내셨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손 교수의 독문학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은 선생님의 인품과 더불어 릴케 번역에 감탄하곤 했다. 30년 이상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두환(건국대 명예교수), 엄선애 (경성대 교수), 김재혁(고려대 교수), 안문영(충남대 명예교수) 등 국내의 저명한 릴케 학자들을 길러냈다. 셋째로 평생 릴케를 사랑하고 연구해온 학자가 릴케 연구서보다는 번역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한다. 넷째로 릴케 학자이기 이전에 국문학사에서 이미 1950년대 시인으로 분류되는 ‘시인 손재준’이 릴케를 어떻게 수용하고 우리 시문학사에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는지도 궁금하다.


손 교수의 번역은 『두이노의 비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책을 넘기다 보면 「기도시집」에서 시작해 「두이노의 비가」까지 릴케를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빠지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돼 있다. 처음부터 찬찬히 시를 읽다보면 한 고독했던 인간 릴케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자라나 유럽과 세상을 방랑하는 한 시인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내적 통찰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잘 나타나 있다. 시를 통한 한 인간의 이력과 자서전이 대화를 하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시가 깨끗하고 유리알처럼 맑다. 내면의 세계가 넓고 폭이 깊다. 정확하고 적절한 시어들이 현의 리듬을 타며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듯이 울리고 있다. 릴케의 시가 그런지 손재준 교수의 번역이 그런지 잠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손 교수는 2013년 『종이꽃』(시문학사)에 수록 된 시 「눈이 큰 사람 -「비가」에서 만나다」에서 릴케에 대한 번역관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는 바람을 동사라 한다 / 흔들리는 것은 모두 / 바람이라 한다 / 그렇게 오래 함께 지냈으면서도 / 아직 모르느냐 한다 / 내가 벌여놓은 일을 슬며시 / 내려다보고는 / 그게 도대체 누구의 시냐고 / 빙긋이 웃으며 돌아선다 / 시는 원래 번역이 안 되는 것이란다 / 그래도 어김없이 / 그는 다시 찾아온다 / 미련스런 나를 보기위해 / 잊지 않고 찾아온다 / 이 불모의 계절에 / 눈이 큰 사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전문
손 교수의 『두이노의 비가』를 읽다보면 릴케의 시도 시이지만 릴케와 한 평생을 길동무하며 살아가는 한 시인의 인생역정과 번역이라는 막중한 과제 앞에 엄밀한 학문성을 바탕으로 전력투구하는 한 독문학자의 진지함이 릴케의 시와 함께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평생 시인이자 독문학자로 살았다. 1953년 “바람결에 / 매디 매디 피가 맺히다 (……) 가냘픈 네 심장에 피가 흐르고, 피가 내리고 (……) 바람이 일면 / 나래 모양 나비나래 모양 / 마구 찢기우며 피를 뿌리는 것……”의 「봉선화」로 문단에 데뷔한 뒤 1957년 독일 유학의 길에 올라 4년간 독일 뮌헨에서, 그 다음 4년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수학했다. 그가 유학한 장소는 독일에서도 릴케가 떠돌던 보헤미아 지방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다. 손 교수는 그곳에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내며 릴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때가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이다. 1964년부터 1999년까지 고려대에서 재직하며 릴케를 강의했다. 고려대에서 퇴직한 다음 15년 정도의 기간을 고독하게 인생과 세월을 관조하며 번역한 책이 이번 『두이노의 비가』다. 삶의 깊숙한 경지에 이르고, 학자로서 살아온 삶을 정리하는 길목에서 이런 번역이 가능했다는 것은 우리들 후학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 교수의 번역관과 개인적인 인생역정을 보면 문법 규칙에 억눌려 억지로 릴케를 번역하지는 않았음을 쉬 알 게 된다. 그렇다고 감동을 주기위한 강의식의 번역 또한 아닐 것이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가 릴케 만년의 대작이듯이 손 교수의 번역 역시 인생과 세상을 관조하며 세월을 되돌아보는 한 시인이자 한 독문학자의 만년의 작업이다. 그의 번역은 단순한 독일어만의 번역이 아니라 인간과 시에 대한 통찰의 번역이라고 하는 게 적확할 것 같다. 독일시를 그저 알맞게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결과 정서를 충분히 살리며 시의 기본인 리듬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깊이 있는 번역이기 때문이다.
제자인 필자가 감히 어찌 스승의 力作에 이런저런 말을 붙일 수 있으리오! 다만 문학 비평가들과 독문학자들의 애정 어린 토론을 기대할 뿐이다. 그리고 릴케를 흠모하는 일반 독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읽고 감동해도 무방한 책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

서장원 고려대·독일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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