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의 초기부터 존재와 생성은 상반되는 개념들로 간주됐다. 탄생으로부터 성장과 변화 그리고 소멸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생성의 세계에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 만물을 지배하는 견고한 원리를 찾고자 하는 존재의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의 철학은 그에 대한 주석이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다양성 속에서 완벽한 통일을 찾고자 하는 열망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됐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로 대표되는 생성의 철학은 그럴듯한 후계자를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근대 말에 부분적으로 그러나 격렬하게 도전받기 시작한다. 우리는 베르그손 이전에 니체라는 생성철학의 거인을 알고 있다. 니체와 베르그손의 공통점은 서양의 고대와 근대를 관류한 본질주의와 법칙주의 즉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어떠한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오래된 역사에 돌을 던지게 했을까. 필자는 그것이 두 철학자의 생명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생명현상은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생리학과 진화론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베르그손의 경우 생명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자료들을 직접 검토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생성의 문법을 다듬어낸다.
진화를 창조적 생성으로 이해한 베르그손
생명이라는 주제는 철학에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으로 잘 알려진 데카르트의 철학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만 봐도 그렇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순수 사유인 정신 그리고 물질의 일부인 육체로 이뤄져 있다. 생명은 물질대사와 같은 육체의 활동에 국한돼 그 범주적 고유성을 잃어버린다. 아마도 이때부터 생명은 소수자로 전락하고 거대담론의 주체는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성철학은 법칙에 대한 사건의 우위, 필연성에 대한 우발성의 우위, 보편성에 대한 현존재성의 우위, 영원성에 대한 역사와 시간의 우위에서 생명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복이 단순한 반발에 그친다면 이 또한 거대 주류 담론의 역사에 재편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다. 그것이 생성의 문법이 요구되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상언어가 사용되는 각각의 사례들로부터 논리적 범주들을 추출해 오늘날까지 상식과 학문세계에서 두루 통용되는 고전적인 논리학을 만들어냈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범주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생명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범주가 필요하다. 필자는 베르그손이 생명과 의식을 모범으로 하는 생성의 문법을 만드는 과정을 추적하고 명료화하면서 흔히 유심론으로 일컬어지는 국면을 자연화하고자 했다. 베르그손의 생성철학을 이어받은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에게서도 이와 같은 공통된 문제의식이 나타난다. 생명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현상이며 정신도 그러하다. 초월적 원인을 도입하는 것은 더 이상 어디서도 지지받을 수 없다. 그러나 자연적 현상들을 또 다른 인위적 도식으로 재구성해 조명하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다.
네 개의 돌다리 철학자들이 뿜어내는 별빛
필자가 대면시킨 네 철학자들, 즉 베르그손에서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에 이르는 생성철학자들은 기계론적 도식의 단순명료함을 거부한다. 생명을 비롯해 인간과 사회, 물질 현상까지도 그것들이 내포하는 복잡성과 역동성을 단순화할 때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 꽁트이래 실증주의의 흐름이 이미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실증주의는 신학적 비합리주의에 대항하는 계몽의 기획에서 합당한 기여를 했지만 이제 그것이 손대는 모든 것을 고체화하는 마이다스의 손이 돼버렸다. 기계론의 생물학적 형태인 유전적 환원주의는 코드와 유전프로그램의 개념에 의해 결정론적인 인간 이해를 이끌어냈다. 생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은 유전적 결정론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생물학자들 내부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가 있었으나 주류생물학의 기계론적 태도로 인해 외면 당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주류생물학계 내에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 됐다.
사실 필자가 생성철학의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 건너야 하는 네 개의 돌다리로 제시한 철학자들의 계보는 프랑스에서조차 뚜렷한 흐름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들을 잇는 사유의 혈통 자체보다는 각 철학자들의 독창성이 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상을 일정수의 공통적 항목 안에서 분류하는 영미의 전통과는 달리 사상가의 개별적 독창성 자체를 존중하는 프랑스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지구의 반 바퀴를 도는 우리의 지평에서 사유할 때 맥락이 배제된 독창성에 대한 지나친 존중은 종종 한 사상가에 대한 우상화에 이르기 쉽다. 별빛의 강도는 우리로부터 위치한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게다가 멀리서 보면 별들 하나하나보다는 그것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별자리 모양이 우리 눈에 크게 들어온다. 그것은 가까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생성철학자들 각각이 스스로의 생애 동안 전력을 다해 씨름한 문제들을 서로 연결하고, 대면시키고, 서로 대화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이뤄낸 어슴푸레한 그림을 더 밝은 곳에서 드러내 보이려 했다.
황수영 세종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필자는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 프랑스 생명철학을 연구했으며 최근에는 현대생물학과 의철학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