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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부 말할 필요가 없다
작가는 전부 말할 필요가 없다
  • 교수신문
  • 승인 2014.11.0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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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피에르 마슈레 지음|윤진 옮김|그린비|416쪽|25,000원

비평이 작품을 소비 제품으로 다루려고 하면 바로 경험적 환상(일차적인 환상)에 빠지게 된다. 이미 주어져 있는 대상을 어떻게 받을지 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적 환상은 혼자 오지 않는다. 이내 규범적 환상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평은 작품을 보다 더 잘 흡수되는 상태로 변화시키려 한다. 작품이 지니는 사실상의 실재성이 거부되며, 작품은 더 이상 주어진 여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작품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의도가 일시적으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국 문학작품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사실은 결과이자 생산물이다. 작품은 절대 원인이 아니다. 아무런 의도나 법칙 없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매 층위에서 정확하게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나타나는 무질서와 우연은 혼란을 불러오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향한 지표이다. 작품은 그런 무질서와 우연을 통해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처럼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된 양상이 확실하고 명백한 작품에서는 인물 묘사, 대사, 연극적 대화 등과 같은 전통적인 작품 구성 요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물론 형식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결정돼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문학생산에서는 즉석에서 만드는 것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쥘 베른이 제3공화국 초기의 부르주아라는 말에 담긴 모든 함의(투기욕, 과학주의, 그리고 부르주아 혁명을 만드는 모든 것)대로의 부르주아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작가는 원래 자신이 ‘표상’하고 있는-설사 그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하더라도-이데올로기를 기계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엄밀하게 똑같이 반영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형상화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쥘 베른의 작품은 읽히지 않을 것이다. 쥘 베른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적 환경과 관련해 나름의 입장(주관적 관점의 입장만은 아니다)을 보게(혹은 읽게) 한다. 그에 대해서 특수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그 이미지는 주어진 대로의 이데올로기와 뒤섞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배반하든가 문제를 제기하든가 아니면 변경시킨다. 작품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바로 이 이미지를 설명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전부 말할 필요는 없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스피노자 연구자이며 문학이론 연구자로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피에르 마슈레의 대표작으로, 1994년 국내에 첫 소개된 것을 20년만에 새롭게 번역, 소개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조르주 캉귈렘과 루이 알튀세르를 사사한 저자는 문학작품은 단일한 기원과 통일성을 가진 작가의 의도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생산자의 의도와 무관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문학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작품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고, 작품이 진술하지 않은 것을 통해 작품의 징후적 억압, 회피, 미끄러짐, 자기 모순 등을 포착해 내는, 작품에 가해지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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