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3:20 (금)
112년 만의 ‘完譯’ … “규약은 자유로운 지성의 소산”
112년 만의 ‘完譯’ … “규약은 자유로운 지성의 소산”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1.04 15: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_ 『과학과 가설』 앙리 푸앵카레 지음|이정우·이규원 옮김|에피스테메|272쪽|19,000원

▲ 프랑스의 천재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책의 종착지는 독자일까. 1902년에 초판이 나왔고, 1백년도 더 지나 그것을 우리말로 완역했다면, 책의 운명이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의 수학자, 이론물리학자, 과학철자인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 1854~1912)의 『과학과 가설』은 책의 문제적 내용도 중요하지만, 번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구 안에 있으면서 지구의 모양을 추측했듯 우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우주의 모양을 측정할 수 있을까. 수학계에서 100년간 난제로 남아 있던 ‘푸앵카레의 추측’은 우주의 모양을 추측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됐다. 최근 러시아의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이 이를 증명하면서 푸앵카레는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방송통신대 학술도서 브랜드인 에피스테메에서 출간한 이 책은, 천재 수학자 푸앵카레가 대중을 위해 집필한 과학사상서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과학과 가설(La Science et l’hypothe´se)』(1903), 『과학의 가치(La Valeur de la Science)』(1904), 『과학과 방법(Science et Me´thode)』(1908) 중 첫 저작물이다.
이번 번역서는 1917년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철학자인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와 의학사를 공부하고 있는 이규원이 함께 번역했다. 일반 대중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분야인 과학에 대해 비교적 쉽게 풀어 쓴 이 책은 출간 당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위상수학 창시한 과학철학자
푸앵카레는 당대에 활동한 최고의 수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현대수학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위상수학(topology)의 창시자다. 또한 당대의 뛰어난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활동한 시대는 앙리 베르그송, 레옹 브렁슈비크, 앙드레 르르와, 피에르 뒤엠, 에밀 메이에르송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과학철학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로, 특히 과학적 탐구의 두 가지 해석인 실재론과 유명론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던 시대였다. “푸앵카레는 극단적인 유명론을 비판하면서도 과학에서의 ‘규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규약주의(conventionalism)를 주장했다.” 옮긴이들은 이 책이 “과학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좀 더 쉬운 옮긴이 해설이나 해제가 덧붙여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수학자와 과학자들은 가설 없이는 사유의 가지를 뻗어 나갈 수 없는 이들이다. 수학과 과학에는 겉으로는 단순한 가설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의 또는 규약이 숨겨진 경우가 많다. 과학의 기초적 원리 속에서 규약의 자유로운 성격을 발견한 학자들은 자신이 정의한 것에 쉽게 속지는 않는지, 또한 그가 발견했다고 믿는 세계가 그저 변덕에 따라 성립된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언제든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무력한 것일까. 이에 대해 푸앵카레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날마다 과학의 실제 작용을 목격하는데, 이는 과학이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어떤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푸앵카레는 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소박한 독단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사물 사이의 관계이며, 이런 관계 속에서만 인식 가능한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푸앵카레는 산술과 기하학에서부터 역학과 실험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계열을 가로질러 이에 대한 근거를 찾아가는 지적 오딧세이를 보여준다.
이 책 『과학과 가설』을 좀 더 쉽게 읽는 길은 저자 서문 즉, 푸앵카레가 쓴 책의 서문에 있다. “피상적 관찰자에게 과학적 진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과학의 논리는 틀림없는 것이다. 설령 과학자들이 어쩌다 착각했을지라도 그것은 그 규칙을 잘못 이해했을 뿐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서문은 『과학과 가설』을 구성하는 내용에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지도이기도 하다.


푸앵카레는 수학적 진리와 과학적 확실성과 관련, 가설(hypothesis)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조금만 더 숙고해보면 가설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지 깨닫게 된다. 수학자는 가설 없이 나아갈 수 없으며 실험과학자는 더욱더 그렇다는 것을 보아 왔다. 그래서 이 모든 건축물이 견고한 것인지 자문했고, 미풍에조차 쓰러질 수 있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적 태도는 여전히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모든 것을 믿는 것은 둘 다 손쉬운 해결책일지는 모르지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설의 역할’과 ‘규약’의 의미
그래서 푸앵카레는 ‘즉결심판’보다는 ‘가설의 역할’을 세심히 검토할 것을 거듭 주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푸앵카레는 가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어떤 것은 검증될 수 있고 실험을 통해 한번 확증되면 생산적인 진리가 되며, 또 어떤 것은 우리를 오류로 이끌지 않고 사유를 정착시키는 데 유용하며, 마지막으로 또 다른 것은 겉으로만 가설일 뿐, 결국 정의 또는 규약(convention)이 감춰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규약이 감춰진’ 가설이다. 푸앵카레는 이 ‘규약이 감춰진’ 가설을 특히 수학과 이에 밀접한 과학에서 마주치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학은 바로 이로부터 엄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규약은 이 영역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지성적 활동의 소산이다.”


푸앵카레는 자신의 과학사상을 담은 논문과 강연록을 모아 여러 권의 저작을 편찬했다. 『과학과 가설』은 수와 量, 공간, 힘, 자연을 각각 독립된 장으로 해서 다양한 글들이 수록됐다. 「수학적 추론의 본성에 관하여」를 비롯해, 「비유클리드 기하학」, 「상대적 운동과 절대적 운동」, 「물리학에서의 가설」, 「물질의 종말」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쉬운 언어로 담겨져 있다. 그러나 쉬운 언어는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저자가 3부에서 「3부의 전반적 결론」을 덧붙였다면, 전체 내용의 결론도 내렸을 것 같은데, 책의 구성에는 처음부터 그게 빠져 있다.


『과학과 가설』은 중요성과 의미에 비해 너무 늦게 우리말로 완역됐다(30여년전에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학계에서는 이미 소화하고 있었겠지만, 인접 분야 전공자나 대중들에게는 110년이 지나 완전한 얼굴을 드러냈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 학계의 번역문화의 깊이와도 관련된 듯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