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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과 쟁점 : 강단 떠나는 학계의 ‘중진’들
동향과 쟁점 : 강단 떠나는 학계의 ‘중진’들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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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1:21:13

학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기던 교수들이 하나 둘 퇴임하고 있다.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故김준오 전 부산대 교수, 박동환 전 연세대 교수, 박종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조동걸 전 국민대 교수가 줄지어 퇴임하더니 김우창 고려대 교수, 김진균 서울대 교수, 문승익 중앙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교수, 신용하 서울대 교수들도 강단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퇴임교수가 된다는 것이 학문 여정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거목들의 그늘이 사라져 가는 것이 분명한 지금, 학계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이 세대들의 공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새천년에 들어와 학계를 떠나는 세대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3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1960년대에 패기 넘치는 30대로 학계에 자리잡았다. 4·19 혁명 세대이기도 하고, 1970~1980년대 학계의 주역이기도 한 이 세대들은 한국사회의 시대적 변화와 함께 젊음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공통점은 현재 강단에 자리잡은 학자들의 스승이자 학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겨온 학자들이라는 점이다.

이 세대들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는 명료하다. 이 세대들의 특징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세대라는 것. 권태억 서울대 교수(국사학과)는 “이들 세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역사학이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식민사관 극복을 과제로 두고 민족주의라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한국전쟁과 민주화 이행과정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였기에 민중의 문제가 가장 큰 물음이었다. 서구이론을 수용하기에도 급급했던 시대부터 줄곧 한국사회의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한국학계가 이만큼이나마 개념적 논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디딤돌을 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독자적 학문구축의 최초이자 최후 세대

또 다른 평가는 외국학문의 수용에 있어 객관적인 수용을 시도했고, 국내학계의 자생적인 학문의 맹아를 싹 튀운 두 가지 역할이 동시에 일어난 세대라는 것이다. 서양철학자 김상봉씨는 “철학계에서는 박종현 교수가 일본을 경유한 번역이 아닌 순수 원전을 읽어내는 시도를 했고, 박동환 교수는 자생적인 한국 철학, 자기 인식의 철학을 구상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한다. 즉 학문의 바탕이 되는 원전 강독과 그것을 응용하려는 시도가 함께 일어났다는 평가이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이들은 ‘학파’를 구성하기도, 시대의 고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명실공히 학계의 ‘대가’로 자리매김 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도 이 세대가 마주한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권성우 동덕여대 교수(국문학)는 “이들 세대가 학계의 대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선행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전의 한국학계는 사실상 불모지와 다름없었기에 기존의 연구를 의욕적으로 극복하고 다방면으로 거대한 학문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최초이자 최후의 세대인 셈.

그러나 지금 당면한 학계 현실은 앞세대와는 엄연히 다르다. 학문 분과가 과거와 달리 세분화·전문화됐고, 내적인 엄밀성이 강조되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세련돼 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학문적인 ‘대가’를 기대하기 힘들다. ‘전문가’와 ‘대가’의 대립구도라고 할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학문의 목표가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그동안 축적된 학계의 연구결과를 습득하기에 바쁜 까닭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도 쉽지 않다. 하나의 시각으로 학문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가지는 모순을 알고 있는 터라, 내적인 엄밀성을 포기하고 거대한 담론 구축을 시도하는 것을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학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기에 이들의 빈자리는 채우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앞세대의 학문이 가진 실존적 표정을 이어내기도, 그 실존적 고민을 바탕으로 학문체제를 구성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앞세대 교수들 중에서는 종종 박사학위가 없는 교수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그들의 학문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문을 연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이전 세대의 학자들에게서 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상을 본다고 덧붙였다. “이전 세대에서는 그들의 품안에서 비판적인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학자들이 없어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라는 말이 단절돼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했다. 학계의 연구 방식이 세련돼 졌다는 말은 그만큼 학계가 제도화되고 건조해 졌다는 말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대가’와 ‘전문가’의 갈림길에서

그러나 학문에 대한 그 열정을, 실존적 고민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학계의 과제로 남아있다.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후학의 역할이 퇴임세대와 같이 ‘대가’가 되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이들이 하고자 했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실사구시적’인 사회과학의 구축을 위해 다양한 연구역량들을 조직화하고 구체화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학풍의 면면을 이어가려는 고민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다시 학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가’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가’와 ‘전문가’의 대립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국내학계의 토대를 구축한 퇴임세대들의 그 실존적 고민이 다시 학문의 전문화와 같이 어우러질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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