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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건의료의 지속가능성은 ‘이중의 과제’ 해결에 달려 있다
한국 보건의료의 지속가능성은 ‘이중의 과제’ 해결에 달려 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4.10.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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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한국 종합진단, 지속가능발전 탐색 (9) 보건

201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소비자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자신이나 가족이 아플 때 진료 받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 의료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먼저 중요하게 확인해 둘 것이 있다. 보건이나 의료(이하 ‘보건의료’라 한다)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인 반면 건강은 그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이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보건의료는 건강에 기여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소득이나 교육, 노동과 같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 주목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건강 문제와 과제, 그것의 해결 가능성은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와 촘촘하게 결합돼 있다. 따라서 건강에 관심을 갖는다면 보건의료뿐 아니라 사회적 결정요인을 포함한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건강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 자체가 기회이자 위기다. 우선 기회의 측면이다.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긴 수명이야말로 어떤 의미든 진보를 상징하는 직접적 증거다. 더 많은 노동과 생산 그리고 더 ‘좋은’ 삶이 가능하게 됐고, 앞으로도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개인으로도 분명 더 많은 (정의론이 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위기의 가능성 또한 배태돼 있다. 바로 노령 인구의 증가가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노인 인구가 가장 많아졌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위협이자 도전이다.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이미 전체 인구의 12퍼센트를 넘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만 지적해 둔다.


나는 이러한 두 가지 조건, 즉 건강과 보건의료의 사회적 성격, 그리고 유례없이 향상된 건강 수준이라는 조건이 보건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심층 구조와 메커니즘으로 작용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위기를 빚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현상은 지면 사정으로 세 가지만 다룬다.
가장 먼저 비용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여기서 비용은 당연히 의료비 지출을 뜻한다. 경제로 나타나는 보건의 지속가능성이다. 개인 수준에서는 가계의 경제와 소비지출, 사회적으로는 건강보험을 비롯한 비용의 조달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2012년을 기준으로 의료비 지출의 전체 크기는 국내총생산의 7.6퍼센트를 차지한다. 다른 고소득국가와 비교해 아직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다들 말하는 것처럼 빠른 증가 속도가 문제이고, 여기에는 노인 인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노인이 어림잡아 약 세 배의 의료비를 쓰는 만큼, 비용 구조를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노인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 의료비 또한 폭증할 것이 분명하다.


비용의 위기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의 사회적 과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는 그 많은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의 문제다. 어떤 방법(건강보험의 보험료나 조세를 통한 국가 예산)을 택하든 빠르게 늘어나는 비용을 제 때에 충분히 마련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두 번째 과제는 늘어나는 비용 부담으로부터 개인과 가계를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적 보호가 여전히 불충분한 것은 채 해결하지 못한 근대적 과제다. 하지만 비용 지출이 계속 증가하는 상황이면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노인인구 증가를 비용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했지만, 한국의 ‘고비용형’ 보건의료체계가 비용 증가를 증폭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민간부문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이들은 이윤과 영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핵심 구조이자 메커니즘이다. 시장의 효율성보다는 시장실패의 비효율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믿는다. 다만 정책기조 또는 정책 패키지라면 보건의료체계의 (자유지상주의적) ‘시장성’을 완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심 과제가 돼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다뤄야 할 위기는 불평등의 온존 또는 심화 현상이다. 마틴 루터 킹이 말한 대로, “모든 불평등 가운데에 보건의료의 부정의가 가장 충격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게다가 불평등은 단지 정의와 사회윤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심각한 불평등을 그냥 두고도 사회가 계속 발전하고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건강과 보건의료의 불평등은 심각하다. 그 중에서도 서로 다른 계급 또는 계층 사이의 격차는 뚜렷하고 일관된다. 우선 보건의료 불평등은 개인과 가정이 생생하게 경험하는 대로다. 201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소비자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자신이나 가족이 아플 때 진료 받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 진료비 부담과 생계활동 때문이라는 이유를 합하면 55퍼센트 가량이 경제적 이유였다. 개인이 직접 경험하긴 어렵지만, 건강의 불평등도 덜하지 않다. 2010년 한 해 동안의 30~44세 연령의 사망률을 분석한 자료(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3년)를 보자. 남성에서 중졸 이하 집단은 대졸 이상인 집단보다 사망률이 8.4배 높았고, 고졸 집단은 대졸 이상에 비해 사망률이 2.2배 높았다. 같은 연령집단의 여성 사망률도 대졸 이상 집단에 비해 중졸 이하는 8.1배, 고졸은 1.8배 높았다.


건강과 보건의료의 불평등은 사회적 결정요인, 즉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해결 방법을 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소득과 교육의 불평등, 노동의 조건, 고용 불안정, 지역간 불평등 따위가 건강 불평등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들이다. 꼭 건강과 보건이라는 결과가 아니라도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인 만큼 상세한 과제를 따로 덧붙이지는 않는다.


세 번째 위기는 하나의 역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겉으로는 빠르게 발전하는 것 같은 건강과 보건의료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제도(넓은 의미에서)들이 진정한 인간 생활의 필요와 희망에 부합하는가의 문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건강과 보건의료를 추구하는 데서 스스로의 능력과 자율성을 잃어버렸다고 근대화된 보건의료(와 그 의식)를 비판했다. 하지만 꼭 이처럼 급진적 관점이 아니어도 현대 보건의료의 ‘소외’는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다.


주로 약품과 장비, 수술과 병원, 전문가에 의존하던 것이 전염병 시대의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만성질환과 자기관리, 일상생활과 지역사회, 그리고 협업과 참여라는 새로운 방향을 거부할 수 없다. ‘인간화’의 과제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근대 이후 지속된 포디즘적 의료체계(특히 대형병원 중심)와 그 토대가 동요하면서 근본적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지식과 담론, 사회 활동, 정책은 새로운 전환을 준비하지 못한, 말하자면 지체된 상태다. 전환의 계기와 동력은 시민사회와 갱신된 민주주의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관료주의와 전문직업주의를 넘어서는 것과 함께 과잉 시장화 역시 사회적으로 통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와 새 공동체, 공론장을 통한 참여와 민주주의, 자율과 협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비용, 불평등, 새 패러다임의 지체라는 세 가지 위기는 서로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근대적 과제를 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과제를 요구받는다는 뜻에서, 구조적으로는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는 상태다. 결국 한국 보건의 지속가능성은 이러한 이중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비판과대안을위한건강정책학회장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회장과 국제보건의료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고, 『건강할 권리』 등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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