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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인문학 위기론을 성찰하다’를 시작하며
기획연재 : ‘인문학 위기론을 성찰하다’를 시작하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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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1:11:21
인문학 위기론이 사라졌다. 위기론의 주창자들은 어느새 점잖은 인문학자로 되돌아가 있거나 아니면 또 다른 주제에 휘말려들고 있다. 이러한 실종과 브레이크가 의미하는 것은 위기의 극복이 아니라 잠복이다. 잠복한 것은 언제라도 또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재연될지 모른다. 지금 시점에서 인문학 위기론을 점검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전개와 성과를 점검하고, 이 논의를 좀더 정리된 차원에서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쟁과 담론은 시작은 맹렬하지만, 어느덧 슬그머니 사라진다. 지난 몇 년간 지식인 총동원체제로 논의된 ‘인문학의 위기’가 딱 그런 양상이다. 신문 지상에서, 계간지 특집에서, 각 대학의 인문학연구소들이 앞장서 우리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사유구조 전반을 재정돈하려 한 이 대규모 논설전은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비교적 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진행됐다. 인문학의 인간학적 토대에 대한 포스트담론의 공격과 이에 대한 방어, 학부제 실행에 따른 제도적 인문학의 위기와 돌파구 모색, 경제 위기가 가한 압박에 따른 인문과학의 내적 경쟁력 논의 등 복잡하고 다기하게 위기를 진단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위기를 키워왔다.

그런데 이 논의들이 최근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국회도서관에서 ‘인문학 위기’와 관련된 논문이나 글을 찾아보면 1999년 15건, 2000년 11건, 2001년 12건, 2002년 2건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런 수치가 아니더라도 위기론의 실종은 피부로 느껴진다. 실종의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올 하반기 인문학에 지원을 대폭 증가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 때문인가. 아니면 동어반복의 식상함을 피하기 위한 자발적 중단인가 등등. 그런데 위기는 사라졌지만 부흥은 쉽게 예언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 ‘표현인문학’, ‘영상인문학’ 등 최근 단행본으로 나오는 인문학 메타담론서들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고전적 명제를 실천하고 있다. 과연 이런 신인문학론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포월했다고 할 수 있는가.

개념적 혼란과 논의의 비소통성이 문제

인문학 위기에 대한 담론들은 현실을 종단하지 못하고 횡단했다. 그 원인은 인문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논자들마다 큰 차이를 빚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인간적인 것을 규범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광범위하게 설정하는 부류, 인문학의 독일적 전통과 영미적 전통을 구분하는 등 시선을 좁히는 측이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를 펼쳤고, 인문학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교양의 근본단계임을 되풀이 주장하는 측과 인문학의 대상과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태생적인 불안을 주지시키고자 한 반성론자들이 상호 대화에 실패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렇듯 인문학에 대한 인식 자체가 혼란으로 들끓는 상황에서 다양한 위기의 요인들이 도출돼 나왔다. 학부제 시행,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 자본의 전일적 확산, 정보사회의 도래, 근대문명 등이 그 당자들이다. 이것들은 “지식의 교환가치가 지식의 사용가치를 구축”한 자본주의적 현실논리가 인문과학 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진단으로 수렴된다. 그와는 달리 인문학 자체의 성격변화에서 위기의 요인을 본 경우도 있다. 근대학문의 특징인 실증주의적 지식의 보편화가 위기의 원인으로 등장했고, 그 대안으로 인문‘학’이 죽어야 인문‘정신’이 산다는 주장이 펼쳐졌다. 그런가하면 지식이, 외부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내부의 지식생산과정을 탐구대상으로 함으로써 지식의 자기성찰적 성격이 강화되고, 이것을 축으로 인문학이 재편된다는 논의도 있었다.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자를 문제삼은 이들은 주로 동양학계였다. “육화되고 구조화된 우리 정신문화의 식민성과 서구추수주의”가 고질병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런 위기요인들은 의견수렴을 거쳐 주 표적을 생산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갈 뿐이었다. 논쟁이나 좌담 형식을 통한 본격적인 이론적, 사상적 대결도 펼쳐지지 않았다. 또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의 토대인 정보화 과정을 긍정하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문제의 해결을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찾는 논리적인 비일관성도 검열의 과정을 쉽게 빠져나갔다.

이것의 원인으로는 지속적인 논의의 장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상대 인문학연구소가 인문학 위기와 관련해 3~4권의 책을 연속으로 펴냈지만, 참여하는 필자가 모두 달랐고, 그때마다의 주제도 상이했다. 하나를 해결하고 넘어가려는 엄밀함보다는 먼저 전체의 그림을 그리려는, 빨리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 의욕이 강했던 것이 인문학 위기론의 실제 모습이었던 셈이다. 또한 논자들의 글쓰기가 언론이나 출판저널리즘의 요구에 대한 주문생산이거나, 논문의 관행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도 지속적, 합의적 논의의 부재에 대한 원인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신문에서는 앞으로 △인문학 위기론의 대표적 발언자들의 과거와 현재, △객관적 위기요인들의 진정성과 현실성에 대한 검토, △위기론의 수사적·정치적 측면에 대한 접근, △인문학 위기론의 성과들 등 네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학계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조성되기를 바란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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