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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대지' 그리고 더 나은 내일
'영웅이 없는 대지' 그리고 더 나은 내일
  • 이창남 한양대·비교문학
  • 승인 2014.10.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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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창남 한양대·비교문학

▲ 이창남 한양대·비교문학
홍콩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 학생시위대의 시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면, 일정한 문화적 磁場의 흐름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홍콩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초중고 시절에는 「돌아온 외팔이」를 비롯해서 이소룡과 성룡의 무협 액션영화들이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됐고, 대학시절에는「영웅본색」과 같은 액션 영화와「천녀유혼」과 같은 몽환적 영화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한국영화제작자들이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헐리우드 영화들을 밀어내면서 홍콩영화들은 우리 대중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통적인 중국 무술에 기반을 둔 홍콩의 무협, 검객영화에서 황금만능주의와 마약, 폭력 등으로 얼룩진 세태의 절망과 희망을 그리는 이른바 홍콩 느와르라고 불리는 일군의 폭력 액션물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상영되며 호황을 누렸던 영화들의 변화는 홍콩의 영화사를 일별하는 흐름이기도 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에도 적잖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흥행에 성공했던「영웅본색」시리즈는 화려하고도 음산한 홍콩 뒷골목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독특한 배우들과 희망과 절망의 서사로 우리를 사로 잡았던 것 같다. 그 시리즈 중에서「영웅본색 III」은 전작 두 편과 달리 흥행에 실패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영웅본색 III」에 나오는 서사는 홍콩의 오늘날을 시사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오히려 흥미롭다. 1974년 인민해방전선에 의해 함락된 베트남에서 화교들이 홍콩으로 떠나는 것이 그 배경 스토리다.

기억나는 장면은 이렇다. “홍콩으로 가자고? 이 가게를 버리고? 그리고 1997년 이후에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석견).“ 아직도 23년이나 남았는데 뭘 벌써부터 걱정하세요?”(주윤발)

여기서 미래로 설정된 1997년은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한 시점이고, 영화 속의 시간은 1974년 베트남의 종전 시점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은 사실 베트남 종전 이후에서 홍콩 반환 이전 사이이니 사실 이 대화는,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베트남을 홍콩 반환의 메타포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3년은 실제 시간이라기보다는 상상적으로 유예된 시간이며, 홍콩 반환 이전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홍콩 사람들의 염려와 여유가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홍콩 느와르 한편을 시끌벅적한 극장에서 보고, 일본 다국적 기업의 네온이 찬란한 거리를 지나 책방에 즐비하게 널린‘이민가는 길’로 유혹하는 책들 앞에서 넋을 놓는 홍콩의 시민”(『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은 이러한 과도기적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당시‘홍콩에서‘영화업’과‘이민 중개업’이 가장 번창했다’는 냉소적인 지적도 그러한 불안정한 전환기의 사정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홍콩 반환이후 14년이 지난 2014년 불안정한 1국가 2체제의 홍콩에서 반중, 친중 진영이 갈리면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는 최근의 사태는 새삼 흥행에 실패한「영웅본색 III」의 서사와 이를 둘러싼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그러나 홍콩의 현실 문제를 이념이나 체제의 문제만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더 나은 내일(A Better Tomorrow)’이라는 영어 제목을 가진「영웅본색」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이념이나 전망과 관련된 큰 영웅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홍콩 뒷골목에서 활개 치는, 의리와 선의를 가진 소영웅들이었듯이 지금 홍콩 사회의 갈등도 어떤 영웅적 이념이나 체제의 전망과 결합된 충돌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또한 한족 중심의 홍콩이 중국에 대해 갖는 함의는 중국의 여타 소수민족 지역과의 갈등과는 또 다른 측면을 지닐 것이다.

“영웅이 필요한 대지를 불쌍히 여겨라”라는 브레히트의 경고는 이 경우 오히려 위안이 될 듯도 하다. 하지만 영웅이 없는 대지에서 더 나은 내일을 꿈꾸던 주윤발과 같은 우리의 소영웅들의 운명은 어떤 방향에서 전기를 맞을 수 있을지 홍콩 느와르의 분위기를 학생운동의 좌절과 더불어 공유했던 세대들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홍콩의 갈등이 아직 현존하는 과거적 이념과 체제 구도와는 다른 의미의 구도에 대한 전망을 생산하고 실험하는 계기가 된다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창남  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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