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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 한글 없는 한글날 풍경
진단 : 한글 없는 한글날 풍경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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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2 12:17:47
풍경 1. 매콜리(J.D.McCawley) 시카고대 교수(언어학)는 매년 10월 9일이 되면 ‘생일상’을 차린다. 그가 축하하는 생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글이다. 미국인인 그가 한국음식을 차려놓고 한글날을 축하해온 이유는 단 하나, 한글의 우수성에 반했기 때문이다.

정부, 기업, 방송 푸대접 부추겨
풍경 2. 각종 1인 시위가 끊이지 않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전국교직원노조 소속 교사와 참교육학부모회 회원들이 차례로 시위대열에 섰다. 10월 1일부터 계속된 이 시위는 ‘한글날 국경일 제정 추진위원회’에서 마련한 자리. 전국국어교사모임과 한글학회까지 힘을 보탠 추진위의 촉구사항은 한글날을 다시 국경일로 제정하는 것.
두 풍경은 한글을 바라보는 바깥과 안의 극단적인 시각차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한글이 한국을 뛰어넘은 ‘인류 전체’의 뛰어난 문화유산이라면, 안에서 바라보는 한글은 영어로 바꾸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밟히는 천덕꾸러기이다.
한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에서 1989년 ‘세종대왕상’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세종대왕상은 해마다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공적을 끼친 단체나 개인을 뽑아 주는 상으로, 세계에서 한글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잠시 주춤한 듯 보이지만, 최근까지 인터넷 상 최고 화제는 단연 ‘’였다. 어법에도 맞지 않고, 발음도 어려운 이 보도 듣도 못한 용어의 뜻은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을 때 내는 즐거움의 감탄사’,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을 때 내는 어이없는 기분을 표현할 때의 감탄사’, ‘그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내는 소리’라는 ‘사전적 풀이’까지 나와있다.
를 처음 만들어낸 인터넷 싸이트 측은 한글파괴라는 우려에 대해 “인터넷의 고유한 문화이자 유행에 불과하다”라고 밝혔다. 사이버 문화평론가 한기현 씨는 “기득권에 대한 네티즌들의 저항정신이 담긴 말”이라고 지적하면서, “네티즌들이 생각하는 모든 철학이 담겨 있고, 사이버 문화의 현 주소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단순 유행어, 인터넷 문화의 한 코드라고 해서 순전히 한글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로 제쳐둘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인터넷 뒤에 숨은 한글 파괴의 진짜 범인은 정부와 기업, 방송이다. 이대로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는 한 신문에 실린 기고문에서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출범하자마자 한자병용 파동을 일으킨 정권, 대통령은 미국에 가서 영어로 연설하고 국무총리는 일본에 가서 일본어로 연설하는 정권, 산자부 누리집(홈페이지)에는 한글전용법을 어긴 한자혼용 문서가 그득한데 영어로 회의하고 결제를 받게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정권, 거리 간판, 회사 이름, 잡지와 상품 이름이 온통 미국말이고, 국민이 국어보다 영어에 열광하고 있는 판에 교육부장관을 지낸 이들은 영어 조기교육하듯 한자 조기교육 타령이나 하고 있는 정권”이라는 비판이 따갑다.
국제화 세계화를 내걸고 대기업들이 벌이는 ‘改名’도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았다. 8년 전 럭키금성이 ‘LG’라는 영문으로 이름을 바꿀 때만 해도 생소하던 영어 이름은 이제 SK(선경), KT(한국통신), KB(국민은행)까지 보편적인 수준이다. “한글날이 국경일 되면 휴일이 하루 더 늘어 안 된다”라며 국경일 제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기업 이름을 영어로 바꾸고, 영어 이름의 상품을 개발하는 등 한글파괴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공로로 경제 5단체는 지난 해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이 뽑은 ‘우리말 으뜸 훼방꾼’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우리말글 오염 더 방치할 수 없어
우리말의 홀대는 자연스럽게 말글의 오염으로 이어진다. 국어문화운동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2001년 우리말 오염 실태에서 방송매체의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모든 코미디프로그램이나 토크쇼 프로그램에는 제대로 된 한글자막과 출연자들의 대사를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실 방송언어 오염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지만 거의 반영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은 한글을 살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온 방안이다. 한글날을 단순히 공휴일이 아닌 문화를 생각하고 기리는 날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그것인데, 한추위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통해 “우리 민족 최대의 경축일 가운데 하나인 한글날을 일반 기념일로 격하시키고 시대착오적인 한자 복고주의와 로마자 등 외국글자를 숭상하는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 초대 본부장을 지낸 서정수 한양대 명예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의 국경일은 삼일절과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모두 4가지가 있지만, 모두가 정치적인 기념일이고 문화에 관한 국경일은 하루도 없음”을 강조한다. “우리 스스로 문화민족이라고 여기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민족문화의 최고 유산인 한글을 되새기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원 33인의 발의로 지난 해 국회에 상정된 국경일 제정안은 회기를 넘기면서 지금 국회에 계류중이다.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한말글 모임 등 한글단체들은 국경일 추진 운동에 힘을 모으면서, 통신언어바로잡기 운동 등을 벌여나가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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