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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만파식적
  • 교수신문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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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2 12: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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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한양여대·미술사


“창규는 성적은 형한테 치이고 작품은 아빠한테 치이는 것 같아요.”
올 봄 학기 초 고 3인 아들의 대학입시 상담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 한마디가 순간적으로 가슴속에 와서 아프게 박혔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창규에게는 과학고 2년만에 카이스트에 진학한 형이 있고, 아버지는 이름 있는 조각가가 아닌가.
내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는 형제간에 서로 비교하지 말라는 말과, 창규가 형보다 더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형제를 비교하는 말을 삼갔다. 하지만 부모가 조심을 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창규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참 잘 그렸다. 유치원 다닐 때 그린 그림들도 색상이며 느낌이 뛰어났다. 창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작은 인디언들을 공책에 가득 그려놨는데 얼핏 보기에는 모두 똑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인디언들마다 장식이며 옷차림이 모두 각기 다르게 그려진 것을 보고 난 아들이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상상력과 관찰력이 없고서는 그런 그림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창규는 우리 동네에 소재하고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 1이야 평화롭게 보냈지만 고 2 때부터 입시라는 현실에 부닥치게 됐다. 고 2 때 교내 미전에 출품한 작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는데 제목이 ‘창규야 공부해라!’이다. 창규 자신이 두 손으로 얼굴을 짓누르며 공부하라는 엄마의 말에 항의 혹은 절규하는 모습을 흙으로 빚은 것이다. 자화상인 셈이다. 기교도 기교려니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그 후 창규는 고 3이 됐다. “창규야, 1년만 고생하자. 그럼 대학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할 수 있어.”, “창규야, 이제 6개월 남았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자.”, “창규야, 이제 찬바람 분다. 40일 밖에 안 남았어. 이제 마지막 힘을 내야 해.”
하지만 틈만 나면 잠을 잔다. 책상에 앉아서도 자꾸 잠을 잔다. 난 졸음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잠시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도피라고 한다.
창규는 4 시간 안에 흙으로 사람의 얼굴을 똑같이 만들어낼 줄 안다. 물론 그 학교의 다른 아이들도 그만큼은 한다고 한다. 문제는 공부다. 공부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정말로 공부가 어렵다. 미대입시에서 소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창규가 미술에 소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부가 뒤져서 대학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억울하다.
아직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 애가 대학입학에 실패한다면 다시는 공부를 시키지 않을 작정이다. 자신이 언제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해주겠지만 억지로 하는 공부가 소용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쁘고 순진했던 아이의 얼굴이 입시를 맞으면서 짜증과 불만으로 일그러지고 망가지는 것을 보자니 가슴이 아프다.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도 결국은 아들의 능력을 쉽게 인정하지 못해 늘어놓은 넋두리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있는 그대로, 타고난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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