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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 이반 덕성여대
  • 승인 2002.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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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이 반/덕성여대·서양화학과

1학년 데생실이다. 학생들의 긴장된 숨소리와 목탄 긋는 마찰소리만 가득한 공간이다. 학년말 평가에 대비해 모두가 혼신을 다하고 있다. 나는 한달 동안 세네카 석고상에 매달려 있었다. 문지르고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목탄지에 그려 넣은 세네카의 한쪽 눈이 뚫릴 정도였으니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선생님, 제 작품 좀 봐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동료들은 나와 교수의 얼굴을 번갈아 주시하며 내 그림 둘레로 모여들고 그분은 기다렸다는 듯 내 작품 앞에 앉자마자 헝겊지우개로 위에서 아래까지 쓸어내려 모두 지우고는(오랫동안 그린 그림이라 손의 땀이 밴 그 색채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기존의 형체가 안개 뒤의 형상처럼 은은하게 남게 마련이다) 코를 중심으로 비례를 점검하듯 가느다란 목탄의 예리한 선으로 좌표를 긋고 확대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 맙소사, 내가 한달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정성들인 작품인데 싸그리 지워 버리다니….

교수님이 소문난 데생실력을 10여분 정도 발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는 내 자리에 다시 앉았고, 동시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니 반사적으로 그가 조금 전에 수정한 내용들을 양손바닥으로 모두 뭉개버렸다. 아뿔싸 교수님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지웠어도 늦지 않았을 것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모든 교수로부터 조교 추천을 받았지만, 유독 그 한 분의 반대 덕분에(교수회의에서 나를 가리켜 ‘무례한 놈’이라고 하셨다 한다) 모교 그늘에 조교 팔자를 면할 수 있지 않았던가. 비록 저의가 없는 행동이었을지라도 그 분은 인격모독으로 간과할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졸업 후 광화문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드렸으나 외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분의 마음을 돌리는 데 4년 세월이 걸렸다. 그때 나는 절박하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교수가 된다면 학생들의 그림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젤과 캔버스가 빽빽이 들어 찬 실기실 숲을 배회할 때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열린 환경의 실기지도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제부턴가 내게는 폭 넓은 세계에서 방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학생을 마주칠 때마다 침묵의 시선을 함께 나누는 습성이 생겼다.

자기논리란 진정한 자신의 예술체험이며, 그것은 넘어지고 깨지면서 스스로의 방황 끝에 획득되는 생성 원리가 아닌가. 피교육자 스스로가 다양한 작업을 제시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그를 방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의 방황을 정지시키는 불필요한 간섭의 존재일 수도 있고, 그들이 다가오더라도 나 스스로에서 우러나온 논리의 세계가 아닌 의도적 일반론의 언질은 그를 피곤하게 할 뿐 아닌가. 행여 도움말이 용솟음치더라도 그가 추구하는 대상의 지름길을 제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예술교육이란 자율성의 교육이며 인습적 동화에 대한 부정의 정신교육 아닌가. “학교의 산물인 잘 만들어진 머리는 닫혀진 머리임을 경계하라”고 바슐라르가 말했던가. 그러기 위해 태초의 자발성이 인습으로 화하는 매너리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순발력을 키워줘야 하지 않는가, 아니 선생은 자신의 열등감에 정비례하는 우월감의 콤플렉스 속에 자신을 감추는가. 가장 무능한 선생들은 절대적인 힘으로 학생을 지휘하는가. 우리는 예술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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