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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 철학계,‘’김진-한자경 교수 논쟁 뜨거워
학술쟁점 : 철학계,‘’김진-한자경 교수 논쟁 뜨거워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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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2 12:38:05
 ◇ 한자경 교수
또다시 철학 논쟁에 불이 붙었다. 잠잠하던 학계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동양 사상’ 7호(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2)에는 풍성한 논쟁이 실려있다. 그중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의 ‘무아와 윤회 그리고 해탈’이 눈에 띈다. 지난 봄에 시작된 김진 울산대 교수(철학)와의 논쟁이 이어진 것이다. 두 교수 다 칸트와 불교를 연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서로 다른 관점으로 불교에 접근하며 팽팽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두 교수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김 교수가 칸트의 시각에서 불교가 가진 모순을 해결하려는 방법론적 시도를 했다면, 한 교수는 이 방법론 자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다. 불교와 칸트 철학이 가지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논쟁은 지난해 봄 ‘오늘의 동양 사상’ 4호에 한 교수가 김 교수의 저서 ‘칸트와 불교’(철학과 현실사, 2000)에 대한 서평을 하면서 시작됐다. 김 교수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 무아설과 윤회설 사이의 모순을 제기했다. 주요골자는 무아설은 모든 가능한 자아개념을 부정하고 윤회설은 도덕적 실천과 종교적 구원의 주체를 전제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 이로부터 무아설과 윤회설에서 자유 개념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불교적 최고선의 실현은 과연 가능한가를 따지면서 칸트의 요청적 사유방법론으로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한 교수는 ‘불교의 자아관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의 한계’라는 서평을 통해 김 교수의 주장은 무아론적 윤회설을 핵심을 비껴간 논의라고 비판했다. “석가는 오히려 연기설로서 무아설을 정당화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즉 무아와 윤회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는 설명이다.

“불교, 무아설과 윤회설 모순”
그의 말을 빌려보자. “현상적 자아의 연속성과 행위의 책임성, 나아가 윤회 주체의 연속성조차도 실체적 자아의 자기 동일성을 전제할 필요없이(무아론), 연기적 인과 연속성(연기설)만에 의해서도 성립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무아론적 윤회설의 핵심이다”. 한 교수는 이런 오해의 원인을 김교수가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기독교적 사유에서는 인간 인식은 유한하고 그 한계 바깥에 무한자 신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석가나 완전히 깨달은 자의 인식은 무한하며, 그와 같은 무한한 지혜의 각자 너머에 그와 구분되는 또 다른 존재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칸트의 요청은 유한한 인간, 그 한계 밖의 것을 모르기에 마치 존재하는 듯이 믿는다는 뜻이므로 불교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지난 가을 ‘철학 비평’ 6호(세종출판사, 2001)에 ‘칸트주의적 불교해석의 의미 지평’이라는 반론을 게재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의도한 것은 칸트의 요청적 사유방법론이 불교철학에서 제기되는 아포리아를 해석하는 데 유용한가의 문제였다”며 “한 교수의 서평은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관심사를 설파하는데 더 큰 비중을 뒀으며, 칸트와 불교의 비교연구에서 확보한 의미지평의 유용성에 대한 논의보다는 마치 설익은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불교를 곡해하는 것처럼 폄하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라고 반박했다. 논점 이탈의 반론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적 접근엔 한계있다”
또 그는 “연기설 그 자체는 무아설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아설이 정당화되는 것도, 연기설이 윤회적 의미기능을 함축하고 있지만 윤회설 그 자체를 지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여전히 불교 내의 모순을 의식한다.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칸트의 요청은 신앙을 위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도덕을 완성하기 위해 입안된 것”이라 반박한다. 칸트의 관점이 기독교적 관점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시 한 교수의 재반론. ‘오늘의 동양사상’ 7호가 논쟁터였다. 한 교수는 “근본적인 차이는 연기와 무기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불교의 연기론은 자아를 상정하는 실체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지만 김 교수는 연기론을 실체론의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과 과, 업과 보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관계의 근거에 자기동일적 실체, 자아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는 “자기동일적 핵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실체론이라면 그런 실체 없이도, 아니 오히려 실체가 없어야 그런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 나아가 우리가 근원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실은 그런 관계 안에서 성립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론”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시 한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 이해의 차이를 설명한다. 김 교수의 이해가 석가가 논하고자 한 것과는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한 교수는 김 교수의 시도에 대해 “기독교적 접근은 한계가 있다”라고 또다시 잘라 말한다.

관점차 극복하는 깊은 탐구 기대
지난해 봄부터 이번 가을까지 두 교수의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칸트의 방법론으로 불교를 보고자 하는 시도와 불교의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는 두 입장은 여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내부 깊숙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접근할 것인지 ‘입장’ 차이의 단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두 교수의 치열한 논쟁이 서로 다른 ‘관점차이’에 매몰되지 않고 한층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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