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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진실,그것에 다가설 수 있는 몇가지 방법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진실,그것에 다가설 수 있는 몇가지 방법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9.1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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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1. 焉耆의 비밀(2) 焉耆의 말뿌리를 찾아서

▲ 수염이 매력적인 위구르 노인. 사진 번춘방 작가

 

 

인도에서 Agni는 불의 신이다. “에너지를 받아 간직하고 나눠주시는 불의 신 아그니에게 기도를 바치나니”로 시작하는 『리그베다』의 첫 번째 찬가 첫 단어가 Agni다. 현장의 阿耆尼는 바로 범어 Agni의 음차자였다. 焉耆를 포함한 나머지 音寫는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캉
‘금강산도 식후경’은 우리의 문화요, 영어사용자의 문화는 “A loaf of bread is better than the song of many birds(빵 한 조각이 새들의 노랫소리보다 낫다).”이다. 우리가 시각 중심적이라면 저쪽은 청각 중심적인 셈이다. 자고로 우리 한민족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한다. 아주 중요시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우선 세끼를 꼭 챙겨먹어야 한다. 제 때 먹어야 한다. 그리스 여행 중에는 항공기 도착 시간 때문에 밥 때를 놓쳤다가 일행들의 원망을 듣기도 했다. 사실 여행 중에는 예기치 않은 돌발 변수로 꼭 제 시간에 식사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우리네 사람들은 골을 낸다. 몸에 알맞은 음식이 알맞은 시간에 들어가지 못하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이다.


버스텅湖에서 점심을 먹고 ‘언기’로 가다가 시장 앞 노점에서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둥근 밀가루 빵 난(naan)을 사 먹은 건 그런 사정을 감안한 때문이다. 금방 구워낸 난은 따끈한데다 무척이나 고소해 그냥 먹어도 맛있다. 또 누가 맛있게 먹으면 옆의 사람은 덩달아 먹고 싶어진다. 실크로드 여행 중에는 과일 말고도 이런 이국적 먹거리를 먹는 게 즐겁다.


쿠얼러시(庫爾勒市)는 언기회족자치현 남방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에서 가장 큰 주인 바인궈린 몽골 자치주의 주도다. 省都인 우루무치에서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져 있지만 실제 도로 여행으로는 500km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옛날부터 실크로드상의 오아시스 도시로 번창했지만, 최근에는 타림분지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유전개발의 기지로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漢族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 때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위구르족이 한족에 밀리고 있다. 현재는 한족의 비율이 전체 주민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 이름은 때로 영어로 쿠를라(Kurla) 혹은 코를라(Korla)로 표기하기도 한다. 언기로 통하는 鐵門關은 쿠얼러의 북쪽 7km 지점에 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기 쉽기 때문에 고대 비단길을 북쪽의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얼러 시내에는 일명 孔雀江이 흐르고 있다. 그렇다고 공작새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한자어 孔雀은 ‘무두쟁이(제혁업자)’라는 뜻의 위구르어 Konqi를 우연히 비슷한 소리의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강 이름을 왜 ‘무두쟁이의 강(Konqi Darya)’이라 했는지는 모른다. 이 강을 카이두(Kaidu)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몽골 지배의 흔적으로 ‘(물이) 풍부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이름은 流沙河였다.


Kaidu는 인명으로도 쓰였다.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데이 칸(Ögedei Khan)의 아들 카신(Kashin)의 아들, 그러니까 칭기즈칸의 증손자가 바로 카이두(Kaidu, 海都)다. 과거의 작명은 이렇듯 소박하고 단순했다. 카이두는 13세기 신장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했다. 그리고 숙부인 쿠빌라이와 각을 세웠다. 결과는 친족끼리의 싸움이다.
현대 도시 쿠얼러의 전신은 『三國志』「魏志 烏丸鮮卑東夷傳 西戎條」에 등장하는 尉梨國이었던 것 같다. “中道에서 서쪽으로 가면 尉梨國, 危須國, 山王國 등이 있는데 모두 焉耆에 복속해 있고……”
위리국은 『漢書』 「西域傳」에는 尉犁로 표기돼 있으며 尉黎로 기록한 사서도 있다. 샤반느(Chavannes)는 尉犁와 危須를 각각 바그라쉬(Bagrash) 호수 혹은 버스텡(Bostang) 호수 부근으로 보았다. 黃文弼은 쿠얼러 동북쪽, 필자가 지난 번 글에서 모기떼 수난과 함께 언급한 사십리성 남쪽에 있는 넓은 유적지가 위리국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과연 그럴지에 대해 흘러간 역사는 말이 없다. 『中國歷史大辭典』은 위리를 신강 언기현 서남 紫泥泉 일대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듯 『前漢書』 「西域傳 第 66 尉犁國條」를 미뤄 판단해도 쿠얼러는 과거 위리국 위에 세워진 도시다.

 

▲ 아리따운 위구르 여인 사진 번춘방 작가

“(尉犁國의) 도읍은 尉犁城이고, 장안에서 6천750리 떨어져 있다. 호수는 1천200이고 인구는 9천600, 병사는 2천명이다. 위리후·안세후·좌우장·좌우도위·격호군이 각각 1명씩 있고, 역장이 2명 있다. 서쪽으로 300리를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남으로는 선선·차말과 접해 있다.”
3세기에는 언기에 복속됐던 위리국이 북위 시대에는 柳驢城으로 불리다가 그 후 돌궐의 지배하에 놓였다. 648년에는 당나라에 점령돼 언기도독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토번에 점령됐다가, 840년 이후 위구르가 본거지 몽골 초원을 떠나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정착했다. 그 후 카라키타이(西遼), 차가타이 칸국, 준가르 등에 점령됐으며, 마침내 1785년 건륭제에 의해 위리 일대는 물론 파미르 이동의 전 서역이 新疆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됐다. 그리하여 과거는 잊히고 새로운 유전도시 쿠얼러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 대부분 『삼국지』를 읽었을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 다닐 때 그 책을 읽었다. 아마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유비, 조조, 손권, 관우, 장비, 제갈량은 물론, 여포, 동탁, 조자룡 등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 또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의 골자를 머릿속에 담았다. 적벽대전이니 제갈량의 「출사표」, 삼고초려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남자들의 의리, 용기 뭐 이런 것의 중요성은 간파했던 것 같다.


어린 소년의 마음은 황족 유비가 천하를 통일한 주인공이 됐으면 하고 바랐는데, 역사는 奸雄(당시는 그렇게 믿었다) 조조의 손을 들어줬다. 조조의 할아버지는 환관이었다. 당연히 조조의 아버지는 그의 양자였다. 삼국지의 무대가 된 시기 중국은 황건적의 난을 거쳐 중화 본토 각처에 군웅들이 할거하던 때다. 이 가운데 유비, 조조, 손권이 부상했다. 조조가 아닌 그의 아들 조비가 쇠락한 後漢의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화북에 위나라를 세우고(220~265년), 유비는 사천지방에 촉(221~263년)을, 손권은 강남에 오(222~280년)를 수립하면서 역사는 바야흐로 삼국시대로 돌입한다.


마침내 최강 위가 촉을 병합하지만(263년) 위의 장군이었던 사마씨가 서서히 세력을 확장 사마염 때에 이르러 曺씨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국호를 새로이 晉이라 칭한다(265년). 역시 曹魏 元帝로부터의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이면에는 음험한 왕권탈취의 야욕이 숨겨져 있는 시나리오가 선양이다. 15년 뒤에는 강남정권 吳마저 무너뜨리고 통일왕조를 수립하니 삼국쟁패의 최종 승자는 뜻밖에도 사마씨의 晉나라다. 이것이 중국사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삼국지의 세계다. 시간적으로는 채 60년이 안 된다. 그리고 삼국시대는 후세의 역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혼란의 마무리 에피소드일 수 있다.
삼국시대를 끝내고 낙양을 도읍으로 새로운 제국 晉을 개창한 사마염은 晉武帝가 돼 연호를 秦始(265~274년)에서 咸寧(275~279년)을 거쳐 太康(280~289년)으로 정한다. 진시가 촉을 병합한 위를 접수하고 새로운 秦의 시작을 알리는 취지였다면, 오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280년 4월 새롭게 정한 연호 태강은 격동의 세상을 마무리하고 천하가 두루 다 평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중원에서 혼란의 회오리바람이 잦아들 무렵 그 바깥세상에서는 그 나름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 무렵(태강년간)에 서역 언기국의 왕 龍安이 아들 龍會를 보내 入侍했다. 일종의 인질이었던 셈이다. 용안의 부인은 쾌호(獪胡) 출신이었다. 쾌호는 구자의 서쪽에 있는 나라 이름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 일설에는 부견의 명을 받은 呂光이 서역을 정벌한 뒤 大宛을 쾌호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典據를 찾지 못하겠다.


『太平宇記』181 「四夷 10 西戎 2 焉耆國條」의 註에 의하면, 獪의 음이 ‘古邁切’이라 했은즉, 獪胡의 獪는 ‘교활할 쾌’로 읽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獪의 訓에 파랑강충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경멸적으로 파랑강충이(곤충)와도 같은 서역인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명칭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쾌호는 『前漢紀』 권12의 서역36국 중 27개 小國 중 하나인 狐胡國의 이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소국은 가구 수가 700~1천戶 정도였다. 명칭으로 보아 이때는 여우같은 서역인 혹은 여우 토템을 가진 야만집단으로 받아들여졌던가 보다.


언기국왕 용안의 쾌호 출신 부인은 회임한 지 12개월 만에 옆구리를 갈라 아들을 낳았다. 그리하여 이름을 會라 하고 세자로 세웠다. 제왕 시저(Caesar)도 어머니 배를 절개하고야 세상 빛을 보았다. ‘帝王切開’라는 영어가 ‘Caesar's section’이 된 이유다. 회는 어려서부터 용맹스럽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용안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아들 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龜玆王 白山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네가 나를 위해 능히 설욕을 할 수 있어야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회가 왕위에 오르자 白山을 습격해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나라를 점거하고, 아들 熙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왕이 되게 했다. 회는 담대하고 지략이 뛰어나 마침내 서쪽 오랑캐(西胡)를 제패하니 총령(파미르고원) 동쪽에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용맹함만 믿고 경솔한 나머지 어느 날 밖에 나가 잠을 자다가 羅雲이라는 구자 사람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晉書』 四夷傳 第67 焉耆國 참조).


앞서 4세기말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서역정벌 장수 呂光에 의해 구자의 왕위가 白氏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나 언기국에 대한 이야기를 살피다가 이미 한 세대 전인 태강년간(280~289년)에도 구자국의 왕권은 白氏가 쥐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사실 삼국시대 曹魏 甘露 3년(258년) 낙양 白馬寺에 와서 역경일에 종사한 승려 白延도 구자인이었다. 아마 왕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자 왕자로 출가해 고승이 된 帛尸梨密多羅와 帛法矩같은 인물도 낙양에 이르러 포교와 역경 사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帛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의 인도식 佛名이고 후자인 帛法矩는 帛씨성의 법구라는 한자식 佛名인 듯하다. 그런데 白과 帛은 혹 동일음의 異借字가 아닐까.


이제 焉耆國과 관련해 숨겨진 비밀을 말로서 풀어보자. 먼저 언기국의 지배세력은 과연 어떤 부류였을까. 앞에서 보았듯 그 왕의 성이 ‘龍’임은 알았다. 다시 『태평환우기』 181 「四夷 10 西戎 2 焉耆國條」를 본다. 거기에 ‘其王姓龍卽突厥之後(그 왕의 성은 龍으로 돌궐의 후예)’라는 기록이 보인다. 수양제가 중원을 호령하던 隋 大業中(605~616년) 其王 龍突騎支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으며 唐 貞觀 六年(632년)에도 ‘又遣使貢方物’이라는 기록이 있음에 비춰 여전히 언기는 龍氏의 나라였다.
성이 왜 龍일까. 고대 튀르크 문자로 표기된 돌궐비문(Terkh 비문 W2)에 나타난바 돌궐어로 ‘龍’은 ‘울루(ulu)’라 했음에 비춰 한자어 龍은 돌궐어의 음역어라고 짐작된다. 언기의 지배세력 이들은 진정 돌궐계였을까.

 

▲ 천진난만 위구르 소녀 사진 번춘방 작가

『태평환우기』에 그 나라 남자들은 剪髮을 했다고 한다. 머리를 기르지 않고 깎았다는 얘기다. 『北史』 「匈奴宇文莫槐傳」에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깎되 그 정수리에 일부분을 남겨 장식으로 삼는다. 그것이 자라 몇 寸이 되면 곧 그를 다듬어 짧게 한다” 했은즉 흉노와는 다소 다른 두발 관리를 한 셈이다. 『契丹國志』에 거란의 두발 풍속과 관련해 “또 渤海 수령 大舍利 高模翰이 있어 그에게 보병과 기마병 1만 여가 있는데 다 같이 곤발좌임(髡髮左袵)을 한 것이 거란식의 장식이 아닌가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곤발좌임이 어떤 두발형식이었을지는 명확히 모르겠으나 유목민의 생활특성상 머리를 밀고 일부만 남겨 끈으로 묶어 머리 왼쪽으로 늘어뜨린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머리의 주변은 모두 깎고 가운데 부분만 상투를 틀거나() 땋아 드리우는() 형태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遼墓壁畵에 보이는 거란인의 두발 모습은 머리를 길게 묶어 귀 양쪽의 앞 혹은 뒤로 늘어뜨리며, 이마 앞쪽에는 머리를 모아 늘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고대 언기 사람들은 머리를 기르지 않고 밀었음이 분명하다. 변발이나 곤발과는 다소 다른 전발이라 했으므로 이들이 흉노나 선비, 거란, 오환 등과 종족적 차이를 보인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말로 푸는 언기의 마지막 비밀. 첫째, 언기를 접수한 위구르인들은 왜 언기를 黑城이라는 의미의 Karashar라 칭했을까. “언기의 경내에 위리성(옛 위리국)이 나라 남쪽 100리 지점에 있고, 위수성(옛 위수국)은 동쪽 100리 지점에, 흑산성은 동남남으로 166리 지점에, 누란성은 흑산성의 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태평환우기』 181 「四夷 10 西戎 2 焉耆國條 土俗物産篇」의 기록으로 보아 위구르인들이 최초 정착한 지역이 옛 흑산국터가 아닌가 의심된다.


焉耆라는 명칭은 주로 중국 사서에 보이고, 佛書에는 烏夷, 烏耆 등의 형태로 등장한다. 다만 현장의 『대당서역기』만 阿耆尼라 기록하고 있다. 梵語로는 Agnideśa(불의 도시)라고 했다. 동일 대상에 대한 이런 표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이 말로 푸는 焉耆의 마지막 비밀이다. 인도에서 아그니(Agni)는 불의 신이다. “에너지를 받아 간직하고 나눠주시는 불의 신 아그니에게 기도를 바치나니”로 시작하는 『리그베다(Rigveda)』의 첫 번째 찬가 첫 단어가 Agni다. 현장의 阿耆尼는 바로 범어 Agni의 음차자였다. 焉耆를 포함한 나머지 音寫는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말의 불을 때는 ‘아궁이’, 발리의 활화산 ‘아궁(Agung)’산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말은 사람에 의해 옮겨 다니며 다소 다른 모습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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