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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현대자본주의 다시보기 -『기로에 선 자본주의』와『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책들의 풍경] 현대자본주의 다시보기 -『기로에 선 자본주의』와『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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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보다 작은 국가, 보다 작은 시장을 향하여

지난 몇 주간 세계인의 시선은 온통 북미대륙에 집중돼 있었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고어-부시의 법정공방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미국경제의 연착륙/경착륙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리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일급 경제전문가들이 내놓는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은 비관과 낙관이 교차했지만, 그들의 견해차란 기실 내년도 미국경제에 대한 전망의 차이를 반영한 것일 따름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로 전락하고 말았다”거나, “한국의 경제주권은 한국정부도, IMF도 아닌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쥐고 있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새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월스트리트 큰손들이 좌우하는 한국경제?

10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획기적 세계상을 창출한 변화의 핵심 동력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들은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세계화와 정보화다. 문제는 이 같은 핵심적 변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결과를 산출할 것인지를 엄밀하게 예측하고 대안을 강구하는 일이다. 지난 연말을 전후로 출간된 두 권의 책 - ‘기로에 선 자본주의’(앤서니 기든스/윌 허튼 외 지음, 생각의 나무 刊),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알랭 투렌 지음, 당대 刊) - 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과 관련된 동시대 서구 사회과학계의 논의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로에 선 자본주의’의 원제는 ‘경계에서’(On The Edge)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경계(edge)란 흔히 ‘이행기’라는 레닌주의적 수사로 지칭되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의 경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한 다른 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내적/국면적’ 경계인 까닭이다.


공동편집자라고 하지만, 기든스와 허튼 사이의 의견이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윌 허튼이 누군가. 가디언지 편집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 98년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을 두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라 일갈했던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다. 두 사람의 불일치는 우선 현대자본주의의 ‘연속성/불연속성’ 여부를 놓고 드러난다. 기든스가 지금의 자본주의를 △세계적 차원의 통신혁명 △지식경제의 출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반면, 허튼은 “가시적 현란함에도 불구하고 불평등과 권력의 불균형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까닭이다.


주장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기든스는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를 이야기할 때 그 논거를 ‘신경제’로 대표되는 미국경제의 비약적 발전에서 끌어온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지만은 않다. 미국경제의 경착륙 가능성마저 운위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지식경제는 우리의 삶과 노동의 방식이 갖는 특성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기든스의 주장보다는 “미국경제에서 정보기술(IT) 부문의 성장과 생산성은 제조업으로 확산되지 않았으며, 제조업의 생산성은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라는 허튼의 지적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확실히 기든스의 미국 자본주의 예찬은 정도가 지나치다. 이를테면 “경제적 불평등은 유럽보다 미국에서 훨씬 심하지만 다른 형태의 평등주의는 미국에서 더 발전돼 있다”거나 “미국형 자본주의가 독일의 코포라티즘적 자본주의보다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규제가 엄격하다”는 주장이 그렇다. 신기술에 대한 기든스의 과도한 의미부여 또한 그가 일련의 사회학 저서들에서 보여준 통찰의 깊이보다는 기술발전의 힘을 영웅화하는 미래학자들의 멘탈리티에 근접해있다. 허튼은 그것이 기든스가 “신자유주의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근본계율에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알랭 투렌에게 역시 논의의 출발점은 세계화다. 그에게 독특한 점이 있다면 비판과 저항의 타겟을 세계화 자체가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에 한정지을 것을 제안한다는 점이다. 그가 볼 때 세계화는 전통적인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윤리를 훼손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지반 역시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사회운동은 임금과 노동의 조건을 방어하는 데 행동을 집중했던 ‘구사회운동’이 아니라 이민2세대 운동, 반인종주의 운동, 동성애자 운동처럼, ‘문화적 권리의 옹호’를 내세운 ‘새로운 사회운동들’이다. 이러한 투렌의 주장은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 수준 이상의 국가 혹은 현재 수준 이상의 시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하의 국가, 그 이하의 시장”이라는 진술 안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궁극적 지향이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통한 국가/시장의 통제임을 드러내는 정치적 진술인 셈이다.


투렌은 자신의 대안을 ‘2½의 길’이라 지칭한다. 이것은 “배제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의 사회적 재통합”을 추구하는 정치로, ‘노동의 우선권’과 ‘지속가능한 발전’, ‘문화간의 소통’을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중도좌파 노선이다. 2½이란 수사를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겨냥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것은 ‘제3의 길’이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복귀에 힘쓰기보다 이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만 위하고 있다”는 투렌의 비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결국 ‘2½의 길’이란 제3의 길의 ‘우편향’을 교정하기 위해 안출된, 구식 사회민주주의(제2의 길)와 제3의 길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중도노선인 셈이다.

제3의 길의 우경화와 2½의 길

기든스/허튼과 투렌의 저작은 다 같이 세계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고 실천적 개입의 지점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회과학의 임무가 변화의 벡터를 예측하고 실천적 대안을 생산하는 데 있다면, 세계화나 정보화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사회과학의 화두로 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무적인 것은 지난 연말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의 ‘디지털 혁명과 자본주의의 전망’(한울 刊)이 출간됐다는 사실이다. 2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디지털 현상을 단순한 사회문화적 변수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경제’로 대표되는 세계자본주의의 변화상과 맺고 있는 다층적 관계를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담론의 무게는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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