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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깊이읽기2
슬라보예 지젝 깊이읽기2
  • 이만우 / 성공회대 외래교수·사회학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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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2 11:13:22
슬라보예 지젝은 이미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상가들 중의 한 명이다. 현대의 문화와 정치현상을 라캉 식으로 읽으려는 그의 태도는 집요함을 넘어 처절하기까지 하다. 시종일관 수많은 정치적 사건이나 문화적 사례, 그리고 영화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라캉의 난해한 개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의 수혜자이자 전도사인 셈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다소 방만하고 창조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일관되게 환상(특히 도덕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가치지향)의 ‘유혹’을 풀어헤쳐 ‘실재계 윤리(ethics of the Real)’를 구현하려는, 즉 기존의 비판이론을 대신해 새로운 정치전략을 구축하려는 데 자신의 모든 논의를 수렴시키고 있다.

지젝은 우리가 비록 실재계 그 자체에 다다를 수는 없지만 그것의 구조적 환원불가능성을 직면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독려한다. 환상을 가로질러 실재계를 순회하라는 것이다.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실재계의 구조적 환원불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정치전략적 태도가 지젝이 ‘실재계 윤리’라고 부른 것이다. ‘실재계 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사회적 탈구나 ‘심적 외상(trauma)’을 기억하게 만든다.

‘실재계 윤리’는 환상의 사악한 순환을 깨뜨린다. ‘선’ 또는 ‘좋음’의 지속적인 개념화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들을 새롭게 개념화함으로써 환상의 ‘독’이 치유될 수 없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우리의 초점은 그러한 개념화 그 자체의 탈구이어야 한다. 실재계가 그 정치유형을 통해 자신의 현존을 느끼고, 우리가 이러한 현존의 윤리적 지위를 인식하는 계기가 중요하다.

결국 지젝이 중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정치적 주장이라기보다는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의 조직화다. 우리의 향락을 조직하는 환상적 틀로부터 어떻게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또 환상의 영향을 어떻게 제한할 수 있는가는 환상에 의해 고착화된 권위주의적 사회관계를 해체-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대화윤리처럼 환상을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보편적 매체로 전화하는 것은 결코 그 환상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환상의 힘을 제어하려면 상이한 정치전략, 즉 ‘환상 가로지르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젝의 이러한 정치 전략은 통합된 전체로서의 대타자를 전제한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 그의 ‘실재계 윤리’는 동일시의 긍정적 지점을 설정하게 됨에 따라 근본적인 방식으로 환상을 솎아내지 못하고 요즈음 범람하는 ‘타자성 윤리’의 한계 내에 머물고 있다. 이와는 달리 라캉의 정신분석은 대타자 속의 결여와 동일시하는 것이지 실재계와 ‘정치적인 것’을 등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라캉에 의하면, 대타자 속의 결여를 인정하는 것, 다른 말로 민주적 권력의 장소에 내재한 空洞만이 환상의 유혹을 넘어선 정치적 전망을 설명하기 위한 준거점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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