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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명 ‘네반테!’, 코트를 점령하라.
암호명 ‘네반테!’, 코트를 점령하라.
  • 박정진 가톨릭대·독서교육전공
  • 승인 2014.08.25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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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를 하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에 문자를 받았다.
“네반테?”
함께 걷던 동료 교수가 얼핏 그 문자를 보더니 궁금해 하는 얼굴이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7시 논문지도, 네테가 더 좋습니다.”
곧바로 다시 문자가 왔다.
“ㅇㅋ  윤황성 연락 바람”

이런 문자를 받을 때면 나는 어린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테니스 점수가 가장 높은 박 교수님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네 시 반에 테니스’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시는 것부터가 즐겁고, 어느 새 나도 테니스를 좀 치게 된 것 역시 즐겁고, 그런 시간을 함께 해 주시는 ‘윤 교수님과 황 교수님 그리고 성 교수님’ 등이 계시는 것 또한 즐겁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교수 코트가 2면, 학생 코트가 3면이 있다. 대게 오후 5시쯤이 되면 열 명 정도의 교수들이 코트에 모인다. 비가 많이 오는 경우를 빼고는 거의 매일 모여 운동을 한다. 수업이 있거나 일이 있는 경우 몇 분이 빠지기도 하지만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 4명은 모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파트너를 맞춰 좀 일찍 운동하고 싶은 경우에 ‘네반테’라는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파트너를 맞추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테니스 수준이 되시는 분들이 주로 소통하는 문자다. 운동장에서는 운동 실력이 사람의 등급이 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동네 테니스 코트를 나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감히 그런 문자를 받은 내가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필자가 처음 테니스 라켓을 잡은 것은 고등학생 때이다. 방과 후 학교 도서실로 들어가기 전 잠깐의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며 함께 공부 스트레스를 풀던 친구가 테니스를 배우고 있었다는 인연으로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라켓을 쥐어 보았기 때문에 테니스를 쳤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그러다 학교 교사로서 테니스 운동부가 있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내가 운동을 잘하게 보였는지 교장 선생님이 내게 부여한 임무는 체육부장이었다. 체육부장은 테니스 감독을 겸하는 보직이었다. 그것이 테니스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감독의 역할은 코치가 좋은 여건에서 테니스를 지도할 수 있도록 행정적,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뿐이었지만, 각종 대회와 훈련을 따라다니면서 테니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기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게임에 뛰어들기에는 파트너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여서 자주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본격적인 테니스 사랑은 대학 교수가 되던 해에 시작됐다. 첫 학기를 정신없이 보내고 막 겨울방학이 됐을 때 학과 교수님들과 저녁내기 테니스를 하게 됐다. 내가 왜 그런 무(모)한도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하다가 그리 됐다. 그런데 당일 날 아침 눈이 정말 많이 왔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출근을 했다. 점심때까지 눈이 계속 왔으니까 테니스 코트에 올라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문자가 왔다. 코트를 다 치웠으니 게임을 예정대로 한다는……."

원로 교수님 두 분이 그 많은 눈을 모두 치우고, 언 부분은 삽으로 깨서 코트 하나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던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테니스 초보자인 내가 테니스 게임을 한다고 하니까 그 추운 날에 원로 교수님께서 쉽지 않은 노동을 하시며 코트 정리를 해 주셨던 것이다. 물론 그 게임에서 나는 완벽(?)하게 졌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고 20여 명 정도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교수님들과 많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내게는 가장에 기억에 남는 게임이다. 그날 이후로 약 2년간은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테니스를 쳤다. 처음에는 다시 게임을 해서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이었지만, 점차 테니스와 테니스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지난 1년 넘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운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이 교수 테니스 대회를 두 번 우승하고, 두 번 준우승했으며, 총장배 대회에서도 한 번 우승을 했다. 이 정도면 나도 테니스를 사랑하는 사람이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학교에는 재미있는 제도가 있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1점을 부여하고, 예선에서 전패를 하면 1점을 깎는 등의 점수제가 그것이다. 그래서 테니스를 치시는 교수들은 대부분 테니스 점수라는 것이 있는데, 교내 교수 테니스 대회에서는 자신의 점수에 따라 핸디가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수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고 누구나 주장 또는 부장을 맡아 테니스를 함께 즐길 수 있게 돼 있다. 내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받은 점수는 8점이었다. 라켓을 쥐는 힘만 있으면 4점을 준다고들 하는데, 나는 라켓을 몇 번 휘둘러보았다고 판단하셨는지 8점을 주셨다. 그러다가 몇 번의 우승을 하면서 점수를 받아 지금은 17점이 됐다. 20점이 넘는 고수들도 꽤 있다. 내게 문자를 보내신 분들이 그런 고수들이다.

그리고 초보자인 내가 학교에 온 초기 2년 동안 테니스를 열심히 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학교만의 테니스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과는 관계없이 테니스 코트에 나온 순서대로 파트너를 삼아 테니스를 치는 것이다. 운동에서는 고수와 하수가 갈리기 마련인데 우리 코트에서는 굳이 그렇게 나누지 않고 서로 파트너가 돼 준다. 그러다 보니 고수들이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 초보자에게 고수들이 파트너나 상대가 돼 준 것은 나에겐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 고수들은 나 때문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점이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점이다. 그분들이 그렇게 쳐 주셨기 때문에 내가 현재의 17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하수들이 고수들을 배려해서 먼저 코트에 왔어도 살짝 빠져주기도 한다. 이런 조화 때문에 코트에는 언제나 활력이 있고 우리만의 情이 함께 한다.

그런 이유로 공식적인 봄과 가을 대회 이외에 회갑이나 칠순이 되시는 분을 위한 기념대회를 하기도 하고, 방학에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담아 여름과 겨울 대회를 작게 운영하기도 한다. 이런 대회가 있는 날에는 더욱 그렇지만 평상시에도 운동을 하고 나면 대체로 저녁을 함께 하며 가볍게라도 술 한 잔씩 기울이게 마련이다. 교수가 된 이후 자주 술을 마셔보았지만 운동을 끝내고 함께 운동을 한 교수님들과 마시는 그 술만큼 시원하고 맛있는 술은 없었던 것 같다. 술이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와 그렇게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코트를 점령해 주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여러분도 저와 함께 네반테 한번 해 보시렵니까?

 

박정진 가톨릭대·독서교육전공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립국어원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한 후 가톨릭대 교육대학원 독서교육전공에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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