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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깊이읽기
슬라보예 지젝 깊이읽기
  • 홍준기 서울대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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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2 11:11:13
홍준기 / 서울대 강사·정신분석학

많은 이들이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프로이트를 바탕으로 라캉을 읽은 것이 아니라 라캉을 통해 프로이트를 읽게 되는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연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라캉을 읽기 위해 지젝이라는 또 하나의 ‘험난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래서 지젝을 통해 라캉에 접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문제가 독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듯싶다. ‘라캉의 지젝인가, 지젝의 라캉인가.’ 이 질문은 지젝이 라캉을 제대로 소개 혹은 해석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디로 말한다면, 지젝의 라캉은 ‘어떤 면에서는’ 라캉의 라캉보다 더 탁월한, 그러면서도 라캉의 이론에 아주 충실한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지젝은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긴 라캉 정신분석 이론의 ‘어떤 특정 부분’을 강조, 확대,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지젝의 여러 저작들을 검토할 때 그는 1)‘후기구조주의’라는 라캉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정정하면서 라캉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비합리주의자로 오인된 왜곡된 라캉의 이미지에 반대해 계몽주의적 전통 속에 라캉을 자리매긴다. 2)라캉 정신분석학의 기초 위에서 헤겔 변증법을 새로 읽는다. 예컨대 ‘관념론적 일원론’이라는 헤겔 해석은 전적으로 오해임을 밝히며, 더 나아가 헤겔을 라캉 혹은 정신분석학 이론 그 자체의 철학적 선구자로 다시 자리매긴다. 3)라캉 정신분석학과 맑스의 이론을 결합한 새로운 사회철학 이론을 수립한다. 예컨대 상품 물신성과 같은 잘 알려진 고전적 모티프에 대한 새로운 독해, 그리고 이데올로기론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고정점’, ‘숭고한 대상’, ‘잉여향유’ 같은 라캉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 이데올로기론의 정립에 기여한다.

이 점에서 지젝은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을 시도했던, ‘비교조적이면서도 탁월한’ 사상사적 전통,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학파, 알튀세학파 등의 뒤를 잇고 있다. 물론 이들 학파들이 지젝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많은 토론을 요하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젝은 라캉에 열광한 것만큼이나 맑스에게도 열광했으며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사회철학 이론을 수립하고자 노력했고, 그 노력은 성공적이었다고 필자는 본다. 4)잘 알려져 있듯이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와 라캉 이론을 접목한다. 지젝을 대중적 스타로 만든 것이 바로 이러한 영화분석 작업이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의 탁월한 계승자임에 틀림없다. ‘문자적으로’ 라캉의 글에 얽매이는 재미없는, ‘충복스런’ 계승자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라캉의 반역자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담하고 현기증 나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라캉 이론의 ‘개방성’과 ‘독창성’을 입증하는 귀중한 문화적 실험이요 업적이다. 라캉이 살아있다면 ‘내 아들아 잘 했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도 그러한 칭찬을 듣기 원한다면 그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을 모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지젝과 라캉이 같으면서 다르듯이, 우리도 지젝과 무언가 달라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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