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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를 쉽게 잊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과거를 쉽게 잊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4.08.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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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재평가: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토니 주트 지음|조행복 옮김|열린책들|612쪽|28,000원

 

▲ 토니 주트는 뉴욕대 에리히 레마크르 연구소 책임자로 일했다.
이 책은 『포스트워(Postwar)』의 저자인 토니 주트가 1994년부터 2006년 사이에 여러 잡지에 발표한 긴 서평 형식의 글을 모은 일종의 평론집이다. 토니 주트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프랑스 사회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전후 프랑스 지식인 특히 장폴 사르트르가 스탈린 체제에 보여준 맹목적인 신뢰를 호되게 비판한 『불완전한 과거(Past Imperfect)』를 발표한 후로 유명해졌으며 200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사를 상세히 서술한 『포스트워』를 발표했다. 뉴욕대의 에리히 레마르크 연구소의 책임자로 일했고 2010년에 근위축성측색경화증(루게릭병)으로 사망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의 관심은 20세기 지식인과 국가의 역할인데, 이는 주트의 연구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는 역사의식이 깔려있다.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옹호
토니 주트는 미국보다는 유럽이 사람이 살기에 더 좋은 곳이라고 본다. 20세기는 한편으로는 두 차례 세계대전이 대표하듯이 파괴와 혼란, 비극의 시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삶이 여러 측면에서 크게 개선된 시대였는데, 지금에 와서 최종적인 승자는 자유로운 시장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보인다. 시장은 그 내적 논리에 맡겨놓을 때에만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이기에 국가의 규제나 개입은 필요 없다는 주장이 다시 우세해진 것이다. 역사적 논거가 있다.


1960년대 말 전후 호경기의 종식과 인플레이션, 여기에 석유파동 같은 외적 요인이 겹쳐 서유럽 국가들은 많은 복지비용을 투입하면서도 종전과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 사회주의 체제들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결국 붕괴했다. 그리하여 ‘계획’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담론의 논거가 흔들렸다. 모든 것을 다 이윤의 논리에 맡겨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믿음이 확산돼 공공성이 강한 사업들은 민영화됐고 국가의 개입 범위는 축소됐다. 이러한 믿음은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심지어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까지 민영화의 기조를 유지했던 영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계획과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계획은 서로 무관하며 ‘계획’의 실패를 주장하는 자들은 주로 영미의 사례를 지지하는 이론가와 정치인들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북유럽 국가들이 입증하듯이 많은 시민이 안전한 삶을 보장받는 곳은 유럽의 복지국가다. 미국에서는 빈부 격차와 기회의 불평등이 심해지는 등 후진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시장지상주의의 득세는 한편으로는 복지국가의 탄생 과정을 망각한 결과였다. 복지국가는 무엇보다도 예방적 국가였다. 경제 불황에 뒤이어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정치로 분열된 세계에서 안정과 안전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복지국가다. 규제하는 국가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는 안정되게 발전했다. 이 점에서 계획과 개입은 성장과 효율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제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장지상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복지국가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제외하면 복지국가를 세운 자들은 자유주의자들, 기독교민주당원들의 작품이었다.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의 완성으로 여러 정파의 합의를 토대로 세웠진 것이었다.


인간의 이기심과 경제주의를 강조하는 시장 숭배는 어떤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소련 해체 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주트는 이 점을 경고하면서 정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건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세계화의 시대에 시장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자리는 늘지 않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은 증가하고 있다. 이 새로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시장의 무자비한 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규제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주트에겐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적격이다.

지식인의 책임
주트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보며 참다운 지식인의 상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닌 평화주의자였다. 참다운 지식인은 무엇이 옳은지를 먼저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지식인은 자기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우선한다. 특히 자기편이 저지른 악행에 눈을 감고 안전한 곳에서 타인에게 피해가 돌아갈 주장들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케스틀러는 반파시즘 투쟁이 한창일 때 스탈린 치하의 소련 현실을 비난하는 것이 파시즘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극복했다.

사이드는 반유대주의의 혐의를 받을까 봐 두려워 이스라엘을 비판하지 못한 사람들과 달리 일신상의 위험을 무릅쓰며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홉스봄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도덕적 유산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자기 안의 악마 공산주의자들과 대면하기를 회피한 서구 좌파 인사들의 사례로서 거론된다. 사르트르는 정치적 폭력을 옹호하고 이데올로기 때문에 소련에서 벌어진 추악한 행태를 못 본 체했으며 남들에겐 어려운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 자기기만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러한 선택 앞에서 주저했다. ‘이론적 실천’을 말하면서 현실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고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알튀세르를 주트는 이해할 수가 없다.


주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지식인상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유대인으로서 청년기에 사회주의적 시오니스트였던 적이 있었고 1987년에 뉴욕으로 온 뒤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두 나라에 대한 관심과 비판은 당연해 보인다. 주트에게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날뛰는 공격적 민족주의 국가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다는 인식이 한동안 그 만행을 가렸지만,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정착촌을 해체하고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개시해야만 한다. 현실은 주트의 바람과는 달리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한때 국내정치와 국제관계에서 복지와 정의, 협상과 도덕이라는 원칙에 헌신했던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부의 축적과 개인의 안전이라는 목표로 후퇴하고 ‘예방적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것을 비판한다. 지금 미국의 ‘자유’ 논객들은 공포를 정치에 이용하며, 이 점에서 과거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그들과 차이가 없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불편한 사건들과 정책들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주트가 말하려는 것이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고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조행복 번역가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포스트워』, 『독재자들』, 『1차세계대전사』, 『백두산으로 가는 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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