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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한국에서 세계사 연구하기
[원로칼럼] 한국에서 세계사 연구하기
  • 박원호 고려대 명예교수·중국사
  • 승인 2014.08.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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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고려대 명예교수·중국사
‘한국사’가 아닌 다른 지역이나 나라의 역사를 전공하느라 땀 흘리고 있는 역사 연구자들에게 나는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먼저 위로를 드리고 싶다. 나 자신도 ‘세계사’의 범주에 들어갈 ‘중국 역사’를 연구한다고 40년간 버둥대온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세계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를테면 한정된 자료로 연구의 새로운 돌파를 하기가 매우 힘들다든지 아니면 전공 관련된 외국어를 미리 익혀 놓아야 하는 부담이 너무 무겁다든지 하는 애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학 사학과 입학을 지망할 당시부터 역사학은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분류된다는 것을 들었던 나는 나름대로 “‘한국사’는 너무 좁고, ‘서양사’는 너무 멀다”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마음속에 ‘동양사’를 일찌감치 점찍어 뒀다.

1970년에 대만대 대학원에 입학함으로써 연구자의 길로 나선 내가 ‘중국사 연구’에 대해 자신감을 잃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 이미 50대에 접어들 무렵이었으므로, 참으로 ‘晩覺’이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나를 ‘연구성(?) 우울증’에 빠트리는 요소는 한국에서 중국사 연구 성과를 출간하면 과연 몇 사람이 읽게 될 것인가 하는 懷疑가 늘 따라다녔다. ‘한국사 연구’는 연구 대상이 한반도 및 주변으로 아주 좁은 지역이고 연구자 대부분이 한국에 집중돼 있는데 비해, ‘세계사 연구’는 전 세계 연구자 중 아주 극소수만이 한국에 있을 뿐이다. 결국 한국 세계사연구가 봉착한 문제의 근원은 우선 연구자 수가 인구와 비교해서 너무 적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계사’를 연구할 때 한국어로 사고하고 토론을 벌이며 또 논저를 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익힌 한국의 역사 연구자는 세계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일 수가 있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전 세계의 연구자에게 한국 연구자의 연구 성과는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한국사 연구 계열의 학회 외에 ‘동양사학회’, ‘서양사학회’를 위시한 학회가 학술지를 발간하며, 「회고와 전망」 등을 통해 정기적으로 성찰과 비평의 기회를 갖는다. 나 자신도 「회고와 전망」에 글을 쓴 적도 있고 학회 회장을 맡은 일도 있음을 먼저 밝히면서, 한국 학계의 연구 성과가 국제적으로 횡적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 한국만을 따로 떼어내어 2~3년간의 종적인 연구 성과를 논평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우려를 내내 떨치기 어려웠다.

한국의 역사학이 해방 당초부터 이렇게 독자적인 학계를 이루게 된 것은 先學의 노력도 있었지만, 민족의 값진 문화자산인 한글의 존재가 영세한 한국 역사학계를 해외의 바람으로부터 차단시켜주는 일면이 있었던 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 세계사연구자들의 논저를 살펴보면 해외의 思潮가 빨리 도입되고 자료 면에서 풍부하며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다양한 외국어·古語 자료도 구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저술한 한국어로 된 논저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해외의 누구에게도 읽힐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왜 심각한 고민이 없는 것일까? 평소 「회고와 전망」등에서 학계를 학문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각이 그다지 뚜렷한 것 같지 않다.

한국어로만 된 세계사연구 논저는 국제적으로 유통될 수 없다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이제 한국의 세계사 연구자들이 논저를 한국에서 출판한 다음 수정을 거쳐 영어나 중국어 출판을 통해 연구 성과의 ‘국제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풋(Input)은 되나 아웃풋(Output)은 작동하지 않는 기묘한 학계가 계속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원호 고려대 명예교수·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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