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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 예술과 전통의 재발견이 됐을 때
먹고살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 예술과 전통의 재발견이 됐을 때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7.2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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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30. 낙화(烙畵) - 김영조 洛花匠(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

烙畵. 지질 烙에 그림 畵. 이 두 단어가 조화를 이뤄 그려지는 그림이 烙畵이다. 좀 생소한 느낌을 주지만, 엄연한 우리 전통의 회화기법이다. 말 그대로 낙화는 종이, 나무, 비단, 가죽, 박 등의 재료 표면을 참숯불에 달궈진 인두로 지져서 그림이나 글씨, 문양을 그리거나 쓰거나 나타내는 전통화법이다. 붓이 아닌 인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화와 공예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낙화에 관해 그 연원과 발생 시기 등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있지만 중국과 한국이 그 종주국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본에는 20세기 초에 전래됐다. 나라에 따라 낙화를 약간씩 다르게 부르는데, 중국은 燙畵, 火畵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燒畵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화와 함께 火畵라고도 한다.

전통 잇는 소신으로 달려온 烙畵인생 42년

▲ 김영조 烙畵匠
낙화에 관한 우리의 역사적 기록이 몇몇 전한다. 조선시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밀양박씨 문중의 ‘호계공파보(虎溪公波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澂)’, 그리고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낙화가 언급되고 있다. 특히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16세기 무렵 안동장씨 어떤 분이 낙화에 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에 낙화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1837년 박창규가 낙화의 기법인 火畵法을 창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시기를 전후로 낙화의 기법이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창규는 우리 전통 낙화의 중흥조로 꼽고 있는데, 특히 추사 김정호는 그를 높이 평가해 ‘火畵道人’이라는 당호를 지어 줬다는 기록이 있다.

낙화는 그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전통의 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해 그야말로 소수의 몇 몇 장인들에 의해 간신히 그 명맥이 유지돼 왔지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예술인들과도 거리가 멀어진 분야로 여겨져 왔다.

김영조(64)는 이런 우리 전통 낙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인간문화재 烙畵 匠이다. 1970년대 초 스무살 초반의 나이로 낙화에 입문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우리의 전통 낙화를 40년이 넘도록 되살려가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장인이다. 그의 낙화 입문은 어찌 보면 평범하다. 그러나 입문 후 소신과 사명감, 그리고 손재주는 남달랐다. 

그의 스승은 일제강점기 때 낙화의 명맥을 이어가던 운포 백학기와 설봉 최성수의 계보를 잇는 전원 전창진 선생이다. 선생은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한국낙화연구소’를 차려 낙화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곳을 제발로 찾아와 가르침을 받은 게 김영조다. 당시 전창진 문하에는 여럿 제자가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는 제자로는 김영조가 유일하다.

그가 낙화를 택한 것은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그가 낙화에 입문한 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 사정 탓도 있다. 화가가 꿈이었던 김영조는 정치지망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가난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서 호구지책으로 낙화를 택한다.

“그때만 해도 낙화라는 말이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말에 마침 모집광고를 낸 낙화연구소로 달려갔지요.”

그는 연구소에서 기숙하며 열심히 배운다. 스승이 그려준 낙화를 익숙해 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 그렸다. 낙화의 소재는 주로 동양화에 등장하는 것 들이었다. 처음에는 사군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꽃과 새, 산수, 인물 등을 두루 섭렵해 배워 나갔다. 잠 잘 시간을 줄여가며 낙화에 몰두했다.

“먹고 살기 위해 택한 낙화의 길이었지만, 스승의 낙화에 대한 생각과 인품에 이끌렸습니다. 그리고 점차 낙화의 전통화법을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익혀 나가면서 우리 전통의 낙화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에 깊이 빠져들게 됐습니다.”

김영조는 스승으로부터의 배움과 수련과정을 통해 낙화가 공예의 한 분야가 아닌 전통회화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그 당시는 낙화가 전통회화라기보다는 상업적인 요소가 강했던 공예품으로 보는 인식이 많았다. 낙화를 기법으로 한 각종 기념품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김영조도 이점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의 남다른 손재주로 만들어진 낙화 작품은 인기가 많았다. 1977년에는 대구의 한 백화점 화랑에서 개인 전시회도 연다. 일본인 관광객이 그의 작품에 매료돼 많이 사갔다. 그는 관광지를 떠돌며 낙화 판매로 재미를 본다. 사계절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던 속리산 아래에 정착해 기념품점을 열었다. 낙화기념품은 잘 팔렸고, 지금 그의 전시장이며 작업실인 오늘의 ‘청목화랑’을 여는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해준 게 1979년이다.

그러다 김영조는 회의에 빠진다. 우리의 전통문화인 낙화를 단지 상업용 관광기념품으로 만들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다.

“우리 전통 낙화를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자괴감이 왔습니다. 전통의 맥을 잇고 예술혼이 담겨진 낙화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상품과 작품은 구별돼야 한다는 고민 끝의 결단이었습니다.”

김영조는 생활의 방편으로 하던 판매 사업은 가족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직 전통 낙화에만 온 힘을 쏟기로 한 것이다. 그 때 이후로 그는 옛 문헌을 뒤지는 한편으로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 전통회화와 낙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림을 감상하고 연구해 잊혀진 기법과 도구들을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전통 낙화 제작에 혼신을 다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나무에 낙을 하는 것과 종이에 낙을 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그의 낙화기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이러한 혹독한 수련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 김영조의 대표낙화작품「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왼쪽)과「낙화 촉진도」(오른쪽).

“인두의 온도가 적당하고 손놀림이 빨라야 종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두의 열로 그림과 선의 음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지요.”

그는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반복된 노력을 계속한 끝에 마음대로 종이에 낙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200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10여 차례 수상을 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김영조의 전통기법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낙화화법은 특히 뎃상력, 그리고 표현력이 뛰어나고 특히 종이와 목재 간 재료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작품의 표현력이 매우 섬세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물론 화법은 전통낙화의 화법을 그대로 잇고 있다.

“우리의 전통낙화는 전통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수묵화 화법과 유사합니다. 수묵화의 농담과 발묵에 비교될 수 있는 낙화의 농담법은 인두의 면을 사용해 빠르게 지지거나 천천히 지지거나 깊게 혹은 얕게 누르거나 하는 등의 손놀림에 의해 표현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이런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말로 들렸다. 사실 김영조는 이런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장인으로 꼽혀진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한지에 묘사한 ‘낙화강산무진도 12폭 병품’, ‘낙화 촉잔도 12폭 병풍’,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리고 목판에 새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등이 이런 전통화법을 바탕으로 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2007년도 작품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석굴암 11면 관음보살상’은 화강암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인두의 촉으로 수백만번 크고 작은 점을 찍어내는 김영조 특유의 ‘중점법’이 구사됐기 때문이다. 그는 인두를 활용해 동양 수묵화의 다양한 기법을 재현하고 있는데, ‘수파운’등 그만의 19개 표현기법이 이에 포함되고 있다.

김영조의 이러한 섬세한 기법을 바탕으로 한 낙화는 세계에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가 지난 5월 이탈리아 아솔로 비엔날레에 초대받아 우리 낙화의 전통미를 한껏 알린 것이 이를 대변한다. 그의 아솔로 비엔날레 초대는 특히 지난해 9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탈리아 작가와 에이전시들이 김영조의 낙화와 시연 모습에 감동받아 이뤄진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다.

國際 비엔날레에 선뵌 한국 전통 烙畵
“낙화는 중국과 한국, 일본에만 있는데, 특히 한국의 낙화를 더 알아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술성이 높아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번 아솔로 비엔날레를 통해 우리의 전통낙화가 세계적인 낙화예술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켰습니다.”

전통낙화는 고된 작업의 산물이다. 고도의 수련과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장인정신으로 점철된 예술혼이 담겨져야 하는 고뇌와 인내와 정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하나, 전통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어야 한다.

김영조가 2010년 10월 국내유일의 전통 烙畵匠인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것은 이러한 고된 작업과 사명감에 대한 결실에 다름 아니다. 김영조의 전통낙화는 현재 그의 딸인 김유진(33) 씨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유진 씨는 지난해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재청장상을 받아 아버지를 이어가는 낙화 전승자로서의 무게를 더했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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