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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造’ 열풍 시대와 ‘유전알고리즘’의 역설
‘創造’ 열풍 시대와 ‘유전알고리즘’의 역설
  • 백승엽 서울대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 선임연구원
  • 승인 2014.07.28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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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백승엽 서울대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 선임연구원

백승엽 서울대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 선임연구원
얼마 전 어딘가에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늘어놓는 푸념 섞인 넋두리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치르고 왔는데, 평균을 훨씬 밑도는 점수를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유가 재미있다. 아이가 틀린 문제 중 하나가,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삼각형(삼각자, 도로 표지판 등)이 보기로 나열돼 있고, 이러한 도형들의 특징을 한 가지만 쓰라는 문제였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아이의 답안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잘 굴러가지 않는다.’

그 외에도 유사한 도형 문항들이 몇 개가 출제 됐는데, 기하학과 관련된 문제들로 매일을 씨름하는 내가 보기에도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저런 놀라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창의적인 답안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전부 ‘오답’이었지만.

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마치 유행병처럼 번져나가는 키워드가 바로 ‘창조’다. 모든 사람들이 창조와 혁신을 부르짖고 있고, ‘다르게 생각하라’던 한 뛰어난 기업가의 자서전은 한동안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 맨 꼭대기를 점령했다. 창조라는 이름이 포함된 대학 학과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각종 학술 이벤트들은 창조를 키워드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내디딘 젊은 세대의 눈에 비친 창조의 실상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못하다. 창조를 꽃 피울 밑거름은 없이 달콤한 열매만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주 복잡하고 수학적으로 명쾌하게 정의하기 힘든 문제를 풀어내는 계산 방법 중에 유전알고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이 알고리즘의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무작위로 답안들을 여러 개 발생시키고 난 뒤, 가장 그럴 듯 해 보이는 답안들을 추려서 다음 단계로 보전하고, 추려지면서 생긴 결원들은 보전된 답안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수정함으로써 다시 채워낸다.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환경에 잘 적응한 종들은 살아남고, 다양한 종들 간의 교배나 그 과정에서의 변이를 통해 기존에는 없었던 우수한 형질이 발현되기도 하면서 진화해가는 생명체들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알고리즘이기에 유전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헌데 흥미로운 것은, 이 유전알고리즘에서 변이 없이 무작정 ‘좋은’ 답들끼리만 진화를 시켜나가면 결국에는 최적의 해로 잘 수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되려, 각 세대를 거듭해 내려가면서 적절한 비율로 변이들을 발생시켜 주어야만 최종적으로 궁극적인 최적해로 수렴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흔히들 ‘정답 사회’라고도 한다. 우리는 주어진 문제에서 정답 아닌 정답을 찾아내는 것을 지속적으로 훈련받고 강요받는다. 학교에서는 스스로 사고하는 방법보다는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정답을 맞히는 방법을 훈련하고, 서열대로 줄 세워진 대학, 직장들 중에서 내 성적에 맞는 정답을 고르고, 미래의 직업과 가정, 삶의 방식조차도 주어진 보기에서 정답을 고르듯 고른다. 유행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은 뒤쳐진 사람이 되고, ‘보편타당한’ 사회 통념을 벗어나는 답을 고르는 사람은 문제아 혹은 이상한 사람으로 배척당한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변이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간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발전도 이러한 틀에서 이뤄져왔지 않았나 싶다. 이미 먼저 발전한 다른 나라에서 제시한 보기들을 바탕으로, 정답 고르기 식으로 발전해온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숙제는 잘해가는 모범생이었지만, 새로운 문제를 출제할 줄 아는 우등생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이러한 방식이, 한국 사람들 특유의 근면함과 더불어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생해왔고,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이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정답 찾기 식의 발전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대형 사고를 칠 수 있는 ‘문제아’들일지도 모른다.

창조라는 것은 다양한 영양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토양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한 관용, 포용,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의적인 사고방식이 밑받침 돼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가 가능하다. 좀 더 다양한 답들에 대해 열려있어야 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돈이 되는 연구나 핵심 산업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쓸데없어 보이고 즉각 돈이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만큼의 실적을 내는 것보다도, 무언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씨름할 시간을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보기에서 정답만을 골라 창조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쪼록 지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창조에 대한 열망이, 단순히 일시적인 구호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수많은 ‘모난 돌’들을 끌어안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는 본질적인 인식 개선으로 연결되길 소망한다.

백승엽 서울대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를 했다. 대통령 Postdoc 펠로우로 선정돼 인간 중심적 제품 설계를 위한 CAD 기술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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