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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적 메시지를 다층화했을 때 ‘해체’되는 것은?
단선적 메시지를 다층화했을 때 ‘해체’되는 것은?
  • 교수신문
  • 승인 2014.07.2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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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를 말한다_ ②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

민족의 정의와 자존심 대결 속에서 정작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는 보다 포괄적인 근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위치한 위안부 문제는 사라진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과)의 책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8)를 둘러싸고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저자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사실과 다른 서술이 많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 박 교수의 학문적 행위를 법적 다툼으로 가져가는 것에 반대했다. <교수신문>은 지난 739호(2014.6.30.)에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한 데 이어, 이번 호에는 책에 담긴 ‘다층적 의미’에 주목한 이창남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의 서평을 싣는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다양한 기고와 논평을 기대한다.

평소에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에 대해 ‘다소 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위안부 상을 설치하는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 장소가 현재 한일관계의 대표적인 교섭기구인 일본 대사관 앞이라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일본과의 관계는 언제까지 과거사의 속박 속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일상적 느낌과 상념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특히 선출직 의원이나 공직자, 학계의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잘못’ 말하는 경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오히려 ‘잘’ 말하는 법을 체득해 대중의 집단적 심성의 엄호를 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거꾸로 가는, 어쩌면 일견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책이지만, 또 용기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전반부에서 위안부에 대한 우리의 몇 가지 편향적 이해를 교정한다. 우선 당시 소녀인 경우는 많지 않았던 위안부들의 나이와 그들이 일본군인들보다는 조선의 업자들에 의해 위안부가 되는 과정, 그리고 전선 안 밖에서 죽음을 앞둔 군인들과의 생활 면면 등을 밝힌다. 여기에 나오는 위안부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다소 다른 모습이다. 저자는 하나의 상으로 고착된 위안부 상이 던지는 단선적 메시지를 이와 같이 다층화함으로써 해체한다.

역사적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특히 상이나 조형물로 고착화시키는 작업은 일종의 선택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적 기억이 이미지로 육화되면서 영구화된다. 말하자면 역사적 기억은 문자로 기록되거나 상으로 조형화되는 순간 불변의 유일한 기억으로 고착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선택에 특정한 정치사회적 입장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다.

‘민족의 딸’로 ‘제국의 희생자’로 육화된 위안부 상과는 다른 모습의 위안부에 대한 선택적 기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책의 전반부를 쓰기 위해 저자가 곧바로 ‘민족의 배반자’이자 ‘제국의 앞잡이’가 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한사람의 양식 있는 학자에게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해당 사안의 전문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학문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현재 그것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법정 논란을 우회하면, 의외로 건질 것이 많다. 시스템과 일상을 구분해서 고찰하는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일상의 실천』이라는 책에서 논하고 있듯이 길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그 길 위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강박이 일상을 온전히 규정하는 것만은 아니며, 일상이 시스템과 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를 통해서 이러한 시스템과 일상 사이의 모순적 교착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시스템만으로 소급시킬 수 없는 위안부의 형성과정과 일상생활의 면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 양자가 서로 교차하면서 위안부라는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스템과 일상이 교차하면서 엮어지는 다면적인 위안부의 면면들을 드러내면서 일반인들이 가진 위안부에 대한 단선적 이해와 그 해결과정에서 나타나는 편향에 도전한다. 심지어 그러한 통념적 이해와 다른 점을 증언하는 위안부들은 더 이상 위안부여서는 안 되는 오늘의 역설, 말하자면 역사적 위안부 이해를 위해 일부 위안부들은 침묵해야만 하는 역설까지 지적하고 있다. 당사자가 빠진 정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일까.

물론 역사적 기억에서 어떤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을 특정한 방향의 기억으로 조직하는 것은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상 제작을 주도했던 에이전시 활동가 그룹이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이들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받는 위안부 문제가 주권적 자존심의 문제로까지 치닫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는 고노담화를 재고한다는 현 일본정부도 물론 한 몫하고 있다. 이러한 위안부 문제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족국가적 틀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는 위안부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이 책은 후반부에 현재 대중의 일반적 인식을 구축하고 있는 에이전시 그룹의 위안부 인식을 재고할 몇 가지 주요한 단서들을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선 식민지 시기 위안부 문제는 냉전기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와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 시스템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기지촌에 위안소를 설치한 한국정부는 언제부터 그렇게 민족의 딸들을 사랑해왔는지? 축첩금지라는 공고가 나붙을 정도로 준합법화된 외도가 많았던 1960~70년대 남성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민족의 부인네들을 위해 헌신했는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주권적 자존심이 쟁점이 되는 것은 민족주의적 편향에서 비롯된 과잉 의제화의 일종이다.
민족의 정의와 자존심 대결 속에서 정작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는 보다 포괄적인 근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위치한 위안부 문제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정의를 독점하고 있는 피해자 민족의 딸로 육화된 위안부가 채운다. 이는 상대에게는 수치를 강박하게 된다. 그것도 특정 기억을 영구화하는 상으로 고착돼 세대를 넘어서 말이다. 이것이 일본 내에서 嫌韓을 부추기고, 일본의 우파 정치가를 돕게 되는 역설적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공동책임과 공동정의가 화해를 위한 길이다.

저자가 “한국을 향해 쓰기로 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읽을 수 있다. 일부 운동그룹에 대한 다소 거칠어 보이는 공격도 있고, 특정한 의혹을 제기하는 방식이 과도하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남이 책임질 문제만은 아니다.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상을 지나치면서, 우리가 먼저 불편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이유들을 들려주고 있다.

 

 

 

이창남 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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