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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 라면
[是非世說] 라면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7.21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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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라면은 이른바 ‘국민식품’이 된지 오래다. 어린 아이서부터 노인들까지 노소와 남녀를 구분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재산의 유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즐기는 ‘식량’이다. 국내 10대 그룹의 오너 중 한 분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라고 말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어떤 유명 정치인도 “나를 지탱해준 가장 큰 벗 중의 하나가 라면이다. 정치인으로 성공한 지금도 라면 사랑은 여전하다”고 말해 어떤 특정 라면 회사를 즐겁게 해준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 라면이 들어온 지 반세기가 넘었다. 어릴 적 배고플 때 밥 대신 라면을 먹고 자란 세대가 우리 사회의 중견으로 자리 잡았을 만큼의 세월이 라면과 함께 한다. 이러니 누구든 라면에 얽힌 추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1973년, 서부전선 송악OP의 여름은 엄청 더웠다. 점심으로 라면이 예고돼 있었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냉 라면’을 해 먹자. 삶은 면에다 찬 우물물을 붓고 그냥 스프를 넣어 먹자는 것이다. 익히지 않은 스프가 잘 풀어질까. 그것은 우려(?)였다. 스프를 넣고 그냥 몇 번 획 젓고는 먹기 시작했다. 쫄깃한 면발, 그리고 그 시원하고도 알 듯 말 듯한 국물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제대 후 집에서 그대로 해 먹어 봤더니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라면은 그런 것이다. 해 먹는 시점과 장소, 상황에 따라 맛이 다른 게 라면이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했다. ……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에 나오는 라면에 관한 한 대목이다. 소설에 빌려 쓰고 있지만, 이는 1960년대 말 라면에 대한 이문열의 추억일 것이다.

라면이 ‘국민식품’으로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됐고, 인터넷엔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이 넘쳐난다. 또 라면을 이용한 갖은 레시피로 먹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국내 라면시장이 사상 처음으로 2조 원대를 돌파했다. 1970년대 100억 원대에서 무려 200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한해 라면 소비량은 35억2천만 개로 1인당 72개꼴로 부동의 세계 1위다. 한국 라면은 우리 국민들뿐 아니라 세계 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고 있다. 지난해 수출한 나라는 124개국으로 수출액이 2억 달러를 넘는다. 우리 라면을 가장 많이 사간 나라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라면 기술을 전수해준 일본이다.

한 끼 식사로 맛있고 배부르게 하면서 추억거리도 제공하는 이 라면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국내 라면산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3년 국내 최초의 라면을 만든 삼양식품을 빼놓을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라면의 역사에서는 한 사람의 힘이 큰 역할을 한다. 전윤중 삼양식품 회장이 바로 그다.

1950년대 말 그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부대 음식찌꺼기로 만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으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보다 “배고픈 우리 국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다 일본 출장 중에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다. 그렇게 해서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963년 9월 15일 처음으로 내 놓은 게 ‘삼양라면’이고, 이게 우리나라 라면의 효시다. 당시 시설 투자와 원료비 등 부담이 컸음에도 라면의 가격은 10원으로 책정했다. 어렵고 못 살던 시절, 라면은 값싼 가격으로 그나마 굶주린 배를 채워 줬다는 점에서 ‘救荒인스턴트식품’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점에서 전 회장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전 회장이 얼마 전 세상을 떴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하며 지금의 갖가지 풍성한 라면 속에서 새삼 라면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기업인으로서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 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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