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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가라타니 고진과 부산
[딸깍발이] 가라타니 고진과 부산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문학
  • 승인 2014.07.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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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문학
지난 5월 필자가 속한 연구소에서 일본의 저명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 선생의 초청 강연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가라타니 선생이 부산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상적으로 선생을 흠모하던 터라 필자는 체류 기간 내내 선생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함께 부산을 관광할 기회도 가졌다. 선생의 기억 속에 부산의 존재감이 남기 위해선 어디를 둘러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 부산의 원도심과 그곳의 몇몇 역사적 근대공간을 보여줬다.

우리는 부산 중·동구의 산복도로와 민주공원, 한때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과 미문화원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 광복동 거리를 걷다 마지막으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방문했다. 그곳의 작은 북카페에 앉아 이 골목의 형성과 부산문화에 관해 짧게 설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과 지식인들이 많은 책을 가져왔고 생계를 위해 그 책들을 사고팔면서 이 골목이 형성됐으며,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이 시기가 많은 작가와 예술가, 지식인들이 이 지역으로 모여들었던 부산문화의 르네상스였다고 말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선생께 오늘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물었다. 선생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과 특히 그곳의 형성 과정이 흥미로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부산문화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연구 같은 것을 소개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오늘의 방문이 선생의 기억에 여운을 남겼구나 생각해 내심 반가우면서도 소개해줄 만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은 필자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부산의 근대문화와 역사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370만 명이 사는 부산에 향토사가는 더러 있지만 부산에 관한 연구자는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다. 하나의 주제에 관한 체계적이며 장기적인 반성작업이 학위논문이라면, 부산을 다룬 학위논문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부산문화를 학위논문의 주제로 쓴 연구자가 있다면, 그 연구자는 대학에 자리 잡는 것을 거의 포기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는 그런 연구자를 받아들일 학과도 조직도 전공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의 중앙집중화, 특히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이 서울과 그 외의 지역을 중심과 주변으로 급속하게 재편했고, 이와 같은 지역의 주변화가 사람들의 심리구조 속으로 내면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지역의 인재에게 자신이 사는 곳은 ‘헤어나야 할’ 굴레, 아니면 ‘헤어나지 못한’ 장애로만 인식됐다. 즉 지역은 지방으로 형상화됐다. 이런 구조 속에선 지역에 바탕을 둔 상상력은 고사하고 지역에 대한 성실한 반성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강연에서 가라타니 선생은 칸트의 세계시민주의가 민족이 아니라 지역, 즉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향토애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했다. 칸트에게 민족은 이성의 격률에 근거하지 않고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망상이기 때문에 이 망상은 세계시민주의에 의해 대체돼야 하는데 그 근간에는 지역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 연장에서 부산처럼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고하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망상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 세계시민적 맥락과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선생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필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과연 지역에서 세계시민주의로 이어질 지역에 대한 향토애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 근거한 민족주의적 망상과 그 연장으로서의 세계화라는 망상이 향토애를 뒤덮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의문의 한편에선 이런 망상에 대응하기 위한 향토애를 가진 작은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생겨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움직임들이 세계시민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 문화의 미래가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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