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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화의 합류와 동아시아 인문학의 이중 과제
두 문화의 합류와 동아시아 인문학의 이중 과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7.15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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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24회차 강연_ 김상환 서울대 교수, ‘학문의 경계와 융합’


지난 5일 ‘문화의 안과 밖’ 24회차 강연은 자주 반복된 내용이지만, 시의성이 높은 주제를 겨냥했다. 강연자는 ‘문화의 안과 밖’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였고, 그는 ‘학문의 경계와 융합―두 문화의 합류를 위하여’를 발표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李箱은 각자의 직업에 붙들려 왜소화돼 가는 근대적 인간을 가리켜 ‘부채꼴 인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부채꼴 인간이란 전문성을 얻는 대신 전인성을 상실한 부분적 인간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이 ‘부채꼴’이 근대적 인간의 운명인 동시에 근대적 학문의 운명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채꼴 사유의 한계를 타파하자는 것에서 현대 융합연구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이번 강연에서 김 교수는 ‘현대의 융합연구는 근대의 통합학문의 이념과 어떻게 다른가?’와 ‘융합연구와 맞물려 일어나는 인식론 및 존재론적 지각변동은 어느 범위에까지 미칠 것인가?’라는 문제를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합류 가능성’이라는 문맥 안에서 검토했다. 최근 일고 있는 文·理科 통합 논의에도 어느 정도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접근이었다.


1950년대 C. P. 스노우에 의해 지식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합류 문제는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두 문화 간 반목의 뿌리는 ‘로고스(logos, 과학적 문화의 언어)와 뮈토스(mythos, 인문적 문화의 언어)의 차이’에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통찰이다.


또한 그는 동아시아의 학자에게 동서 문화 간의 거리를 횡단하는 문제는 인문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 간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으며, 이는 동양적 시선과 서양적 시선을 좌우의 눈처럼 동시에 사용하는 데 익숙한 동아시아의 학자에게 ‘세계사가 선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긍정적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김 교수의 강연을 발췌한다. 사진·자료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아시아적 서사의 특징은 하나의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여러 가지 대안이 교차하면서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유사 변증법적 역량에 있다. 사물의 설명 모델을 구성하기에 이르는 이런 유사 변증법적 劇作은 카오스의 기-입처럼 보인다. 동아시아의 사유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뮈토스의 평면에서 개체는 자신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주변의 요소에 의해 언제든지 전복될 수 위치에 있다. 새옹지마의 우화가 가리키는 것처럼, 상황은 언제든지 반전되고, 거기서 구축된 이야기는 거꾸로 이어질 수 있다. 동아시아적 서사는 언제 부상할지 모르는 이런 반전과 전복의 가능성에 대한 방어적 기록(이른바 ‘우환의식’)에서 비롯됐다. 로고스와 뮈토스의 얽힘: 이런 관점에서 포퍼로 돌아가면, 그가 그리는 제3세계는 지식의 자율적 진화의 공간이되 대단히 안정된 세계다. 여기서 미래는 과거와 연속적이고 동일한 추세 속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포퍼의 제3세계는 여전히 분석의 신화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동서의 사유패러다임이 서로 교차하면서 어떤 벡터적인 도주선이 나타날 수 있을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포퍼의 제3세계에서 모든 이론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잠정적 허구로서 정의될 때, 그래서 이론과 신화의 차이가 소멸할 때 그렇다. 여기서 과학적 명제는 과거의 신화와 동일한 평면에서 경쟁하는 위치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적 명제는 동일한 문제를 놓고 신화적 서사와 경쟁해 그 우월성을 입증한 자리에 있다. 그러나 정반대의 시각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리오타르의 관점에서 과학은 결코 이야기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과학은 형이상학적 서사나 정치적 서사 같은 ‘큰 이야기(grands r´ecits)’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학 스스로 자신의 기초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정당화의 근거를 외부에서 빌려와야 한다는 점은 17세기 초의 과학을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청년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소식을 전해 듣고 인쇄 중이던 『인간론』의 출간을 포기했다. 그리고 관용의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은거하며 자신의 과학을 정당화할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형이상학의 과제는 기계론으로 귀결되는 수리자연학과 서양의 인륜을 떠받치는 기독교 사이에 모종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새롭게 정의하는 두 실체론을 통해 당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이런 데카르트식 형이상학적 담론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은 생각만큼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새로운 제3세계: 이런 사례는 과학이 이야기보다 결코 우월한 체계가 아님을 말한다. 게다가 과학이 형이상학적 담론 같은 큰 이야기에 의존해야 겨우 자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은 로고스와 뮈토스가 생각만큼 명쾌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리오타르는 근대의 큰 이야기를 거부하고 작은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체계를 꿈꿨다. 하나의 이념이나 문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규모의 국지적 담론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세계. 그런 세계는 로고스가 뮈토스로 환원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리 주장은 오로지 이야기로서 성립하고 이야기에 의해서만 정초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극단주의처럼 보인다. 로고스를 뮈토스로 환원하는 것은 뮈토스를 로고스로 환원하는 것 못지않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리 인간은 두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두 종류의 시선으로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닌가. 중세 철학자들은 지향성을 두 가지로 구별했다. 직-지향(intentio recta)과 사-지향(intentio obliqua)이 그것이다. 직-지향은 사물의 사실적 재현을, 반면 사-지향은 사물의 서사적 재현을 추구한다. 직-지향은 중립적 사실을, 반면 사-지향은 가치나 상징적 의미를 향한다. 직-지향은 분석적 취미가 강한 반면, 직-지향은 종합의 취향이 강하다. 직-지향은 논리적 정확성에 이르는 반면, 사-지향은 은유적 풍요성에 이른다. 직-지향은 과학적 사고를, 반면 사-지향은 인문적 사고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다. 인간의 정신은 처음부터 이런 두 가지의 지향성을 통해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 쪽 눈만을 갖고도 사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눈이 협력해서 만드는 시선이 외눈의 시선보다 월등하다. 마찬가지로 직-지향과 사-지향, 로고스와 뮈토스가 함께 만드는 대상관계가 로고스-중심적 관계나 뮈토스-중심적 관계보다 우월한 것이 아닌가. 우월하다기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훨씬 더 원천적인 것이 아닌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원래 함께 얽혀 있는 것처럼, 로고스와 뮈토스는 서로의 주위를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이중성이 인간학적 한계인지 존재론적 사태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현대 과학철학의 결론은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라는 데리다의 말은 결코 실재가 관념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유연성(=텍스트)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 객관적 실재(=바깥)를 부정하는 명제다. 데리다의 이른바 텍스트주의는 실재의 구조에 대한 언명이다. 그것은 실재의 구조가 로고스와 뮈토스, 직-지향과 사-지향, 혹은 제한 경제와 일반 경제가 함께 얽혀가는 어떤 紀造(stricucre)임을 말한다.


데리다의 글-쓰기(´ecriture)라는 용어는 그런 기조적 텍스트인 실재가 성립, 유지되는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두 가지 배타적인 경향의 끈 운동이 새끼줄처럼 서로 꼬이는 가운데 서로 왜곡, 지연, 생략, 변형시키는 절차에 대한 이름이다. 이런 데리다적 의미의 텍스트나 글-쓰기의 공간은 포퍼의 제3세계나 중국적 제3세계를 포괄하는 새로운 유형의 제3세계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결코 우리가 선택할 최후의 대안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있어야 할 제3세계로 가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미래 인문학의 이중 과제: 근대화된 사회일수록 로고스와 뮈토스는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 인간의 행동과 사고가 코드화되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고,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기계적 요소에 의해 구성되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사고는 계산에 가까워진다. 상상은 연산에 의해 대체된다. 첨단과학과 기술이 일상에 침투할수록 로고스와 뮈토스가 분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와 더불어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 문화도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앨런 소칼이나 에드워드 윌슨의 책은 이런 분리의 경향을 예증하는 사례다. 이런 분리가 가져오는 위험은 무엇인가.


사실 오늘날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인문적 문화와 고립된 과학적 문화는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위험성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스노우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문화적 단절을 언급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위험성이다. 스노우는 당대의 인문학이 인간성의 옹호라는 미명 아래 과학과 산업기술에 퍼붓는 맹목적 비난과 테러를 걱정했다. 과학과 산업기술이 역사 진보의 견인차라는 관점에서 과거의 목가적 향수에 벗어나지 못한 인문학이 문명적 발전의 걸림돌이 될 위험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위험은 과학과 산업기술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는 데 있다.


오늘의 과학이나 기술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인류의 삶의 방식에 충격을 주기에 이르렀다. 기존의 상식을 뒤엎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운명을 미궁에 빠뜨릴 실험도 거리낌 없이 진행되고 있다. 가령 세포조작 기술이나 인공지능 기술의 궁극을 생각해보라. 도처에서 경쟁적으로 실험되는 이론과 기술은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그려야 하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고도의 인문적 성찰과 사변적 모험이 아니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자 과제다. 이런 충격과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래의 인문학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중량과 외연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의 자원을 갖춰야 하고, 과거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납득의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서 인문학의 전통을 하나로 엮어가는 길에서 그런 인문학의 구조적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상의 삶에서부터 동양적 시선과 서양적 시선을 좌우의 눈처럼 동시에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지식인에게 동서 문화의 합류와 융합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자 세계사가 선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과학과 인문학의 문화적 단절을 넘어서는 문제는 동서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문제와 함께 이중화돼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의 인문학은 그런 이중의 과제와 씨름할 때야 비로소 포퍼의 제3세계와도 다르고 중국적 제3세계와도 다른 새로운 보편성의 평면을 펼쳐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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