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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화쟁사상을 미학원리로 한 ‘美의 천체도’다
그것은 화쟁사상을 미학원리로 한 ‘美의 천체도’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7.08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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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 얼굴은 무엇일까?

성낙주는 중학교 국어 교사다. 석굴암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던 중 기존 학계의 석굴암 인식에 의문을 품고 석굴암을 연구한 지 20여 년이 됐다. ‘석굴암학’의 백가쟁명을 꿈꾸며 기존 학계의 편견과 오류를 지적해온 그는 2009년 석굴암의 근대사 100년을 돌아보는 사진전 「석굴암 백년의 빛」(불교중앙박물관)을 개최하고, 2010년에는 포항 MBC와 함께 다큐멘터리 「경술국치 백년, 석굴암 백년의 진실」을 제작하는 등 석굴암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물론 이런 활동에는 그가 1999년에 내놓은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이 든든한 뒷받침 역할을 했다. 석굴암의 창건 동기와 주체, 석굴암의 국제성, 석굴암의 미학적 성취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개진한 책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또 다시 문제작을 들고 나왔다.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단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 408쪽, 23,000원)가 그것이다. 1960년대 석굴암 복원공사 이후 50여 년 동안 이어진 ‘석굴암 원형논쟁’을 총망라했다. 그는 이른바 ‘석굴암 원형논쟁’이라 불리는 기존 쟁점들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동안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의 현실과 건축 원리에 어긋난 견해들이 석굴암의 진면목을 가려왔다고 지적한다. 그는 학계가 미처 챙기지 못한 토함산의 기상자료까지 예리하게 살펴 기존 석굴암 담론과는 정반대의 입론에 도달하며, 1천300년 동안 민족과 함께 해온 석굴암을 잃지 않으려면 “신화와 환상을 걷어낸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야 한다”라고 역설한다.


특히 저자는 석굴암 원형논쟁의 불씨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 공사에 대해 ‘원형을 훼손한 공사’라고 비판한 학계의 시각과는 달리, 일제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던 석굴암을 ‘본연의 종교성전으로 되살려낸 광정의 대기록’으로 재평가한다. 기존 학계의 논리대로라면 종교성전으로서의 석굴암 본연의 존엄과 기능을 잃는 것은 물론 토함산의 악천후에 속수무책으로 망가지던 일제 강점기의 ‘박제된 고대유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또 그는 무엇보다 환상이나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바다에 면한 해발 575미터 토함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석굴암의 현실을 직시하기를, 석굴암에 덧칠된 일제의 햇살 이야기를 걷어내기를, 이제라도 연구가 석굴암 원형논쟁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제 설정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석굴암의 실체적 진실이 조금이라도 밝혀지고 나아가 석굴암 담론이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을 책의 결론 부분을 발췌해 들어본다.

▲ 주실 돔 천정의 정면 모습. 당시 돔 천정은 천개석 앞부분이 붕괴된 상태였다. ⓒ안장헌

형논쟁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석굴암 연구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 이르러 석굴암에 관한 우리의 알음알이가 한결 풍부해졌을 것이다. 소모적인 논쟁에 묶여 우리의 석굴암 연구가 정체 내지 퇴행을 거듭해온 것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역시 새로운 의제의 등장을 가로막은 점이다. 논의가 일부 힘 있는 학자들에 의해 독점되면서 동해 일출 담론, 혹은 거기에 기반한 전각철거론이나 광창시설론, 그리고 샘물 위 축조설 같은 문제가 마치 석굴암 연구의 핵심 테마인 양 부각되고 일종의 석굴암 연구 가이드라인으로 기능했다. 후학들이 새로운 의제 설정에 나서지 못하면서 석굴암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것이다.
늦었지만 원형논쟁의 주술에서 벗어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석굴암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대략 세 가지 정도의 관점을 상정해볼 수 있다.


그중의 하나는 經典이라는 관점이다. 석굴암은 흔히 생각하듯 창건주 김대성이 특정 경전에 의거해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교적 깨달음을 문자언어 대신 건축과 조각이라는 조형언어로 서술해놓은 것으로 가정하자는 것이다. 이는 저 원효 성사의 저작물들이 문자의 옷을 빌려 표현된 그의 불교적 깨달음의 경전인 것과 같은 이치다.
과연 석굴암을 응시하노라면 그 갈피갈피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읽혀진다. 건축 및 조각의 여러 요소가 일관된 원리에 따라 구성돼 있음을 알게 되는데, 말하자면 모든 것이 불교의 기본 이념이나 교학에 따라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석굴암을 김대성의 불교적 세계관을 담지하고 있는 한 권의 경전으로 간주해도 좋은 셈이다.


다음은 고대 동서양 문명의 결정체라는 관점이다.
알다시피 석굴암은 다른 문명권의 거대 건축물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규모가 초라하다. 하지만 그 ‘작은 집’에는 우리의 통념을 뛰어넘어 고대 동서양의 종교와 건축과 조각, 그리고 수리학, 토목기술까지 온축돼 있다. 그야말로 그 안에는 온 세계가,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


비근한 예가 주실의 돔 지붕이다. 8세기까지 중앙아시아나 중국, 인도 등지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인 돔 지붕이 화강암으로 완미하게 번안된 것이다. 거기에 주실의 원통형 평면 구성은 비잔틴 초기의 지중해 문명권에 산재한 교당들이나 중앙아시아 쿠차의 쿰트라석굴 등에서, 주실의 감실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석굴 등에서 착안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돔 지붕의 천개석은 용문석굴 연화동의 연화개석에, 주실 입구의 쌍석주는 우리 고구려 쌍영총의 쌍석주는 물론 더 멀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무덤 엘 슈카파의 돌기둥에까지 핏줄이 닿는다.


동서 문명의 정보고속도로인 실크로드 선상에서 조우한, 동서양의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건축양식이 신라인의 창의적 실험을 거쳐 하나로 통합된 것이 경주 석굴암인 셈이다.
이 같은 지적은 조각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본존불이 인도 부다가야의 대탑 내 성도상에서 온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십대 나한은 중국 천룡산석굴 등의 나한도 도상, 여러 보살과 천신은 인도와 중국의 작품들이 거둔 성과를 수유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인왕은 중국 인왕은 말할 것도 없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엘 슈카파의 수호신상에 그 연원이 닿는다. 그러면서도 전체 40상의 용의주도한 구성은 용문석굴 전면의 평면적 구성을 입체적으로 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이밖에도 석굴암의 국제성을 일러주는 자료는 차고 넘치는데, 석굴암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문명의 총화인 것이다.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독창적인 그 점에서 한 권의 ‘문명사’라는 칭호가 석굴암에는 민망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석굴암은 ‘미의 천체도’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경전’이나 ‘문명사’의 관점도 새롭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저 인드라망의 보옥들처럼 얽혀 서로 빛내주는 相卽相入의 진경을 이룩한다는 데 있다. 그중에서도 원효의 대표적인 사상인 화쟁사상을 미학원리로 삼아 모든 요소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 놓고 있다. 그 결과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양 어느 것 하나 소외되거나 배척됨이 없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문자 그대로 ‘미의 천체도’를 실현한 것이다.
이 세가지 관점을 포함해 새로운 의제 개발에 나선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석굴암 담론은 한결 더 풍성한 계절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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