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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은 도살장이자 원더랜드다. 왜냐고?
세계문학은 도살장이자 원더랜드다. 왜냐고?
  • 교수신문
  • 승인 2014.07.0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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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공포의 변증법: 경이로움의 징후들』 프랑코 모네티 지음|조형준 옮김|새물결|456쪽|35,000원

▲ 프랑코 모네티는?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이자 비교문학자로, 스탠퍼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스탠퍼드대 ‘리터러리 랩’을 이끌고 있다. 문학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한 연구 방식이 특징이다. 부르주아 계층의 사회화 과정에서 소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살핀 『세상의 이치』(1987), 근대 유럽 모더니즘의 형성과 자본주의 권력 관계를 살핀 『근대의 서사시』(1995) 등을 썼다.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 1950~)에 따르면 세계문학은 도살장이다. 문학을 놓고 ‘도살장’ 운운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사는 그것이 문학의 불편한 진실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레티가 편집한 『소설 1』에 실린 「사라진 베스트셀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까지의 베스트셀러 중 지금까지 대중이 기억하는 소설은 거의 없다. 또 현재의 정전이 처음부터 고전 반열에 오른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또한 문학사는 경이로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작품(Wonder)의 돌연한 출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세계문학은 원더랜드다. 굳이 프루스트와 조이스, 엘리엇 등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갈리마르와 앙드레 지드에게서 터무니없는 괴짜로 퇴짜를 맞았고,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세계문학은 결국 ‘도살장’과 ‘원더랜드’ 사이에 놓인 셈이다. 동시에 세계문학은 이 원더랜드에 입장할 수 있는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의 경계가 철의 장벽처럼 고수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세계이기도 하다. 모레티 말을 빌리면 기번은 영문학에 속하지만 코넌 도일은 그렇지 않은 완전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궤변들이 난무하는 것이 문학사이기도 하다.


‘도살장’과 ‘원더랜드’와 ‘아파르트헤이트.’ 점입가경인 듯하지만 이것이 문학사의 괴상한 진실이다. 아마 눈치 빠른 독자라면 모레티의 이러한 문제틀이 ‘리얼리즘/모더니즘’ 하는 식의 저 루카치에서부터 연원하는 문학론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레티의 그러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이해에서 (프랑스식의?) 구조주의나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어떤 친화성이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생물학 이론으로 쓴 문학사
만약 모레티가 말하는 문학사가 다른 어떤 문학 이론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위와 같은 괴상망측함을 담을 수 있는 이론틀은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인간의 생명을 연구하는 ‘생물학’(그리고 그와 가장 흡사한 이론을 전개하는 ‘러시아 형식주의’)이 그것이다. 즉 문학은 인간 정신의 지고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사회 속으로 탄생하면 하나의 생물 종이지 않은가? 예를 들어 ‘도살장’은 적자생존 이론으로, ‘원더랜드’는 잃어버린 고리 이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간 교섭’ 이론으로 얼마든지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모레티 이론의 매력인 동시에 온갖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모레티가 말하는 생물학 또는 ‘진화론’이 세간에 상식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모레티와 더불어 사회과학에 ‘진화론’을 도입해 새로운 체계이론을 구축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도 힘주어 강조하듯 ‘진화론’은 점진주의적 발전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한 연속론은 마치 벤야민이 비판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적 개선론과 비슷한 것으로 ‘천둥이 일기 전에 치는 번개’는 전혀 설명할 길이 없다. 이와 관련해 흥미 있는 사실은 국내에서 서구 문학사의 발전사로 원용하는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연속적 발전론이 속류적 다윈주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리얼리즘’을 중심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할 것을 주장하는 이론 또한 외려 문학(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속류적 문학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벤야민-슈미트 ‘예외결정론’도 비판
모레티는 스티븐 제이 굴드를 중심으로 하는 단속 평형설과 굴절 적응 이론을 기본적인 논의틀로 삼아, 이를 러시아 형식주의로 보충하는 방식으로 문학사를 재구성한다. 문학(이론)을 신성시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이론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문학사는 수많은 문학작품이 ‘눈먼 시계공’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많은 작가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유명해졌음’을 알려준다.


모레티에 의한 문학사의 이러한 재구성이 문학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 기반해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문학은 해방적이지도 파괴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성찰과 화해를 위한 타협의 형성물이다.’ ‘문학은 쾌락 원칙이 아니라 현실 원칙의 중간항이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서는 위기를 빼고 사유해야 한다.’ 역시 기존의 우리의 문학 이해와는 완전히 상충된다.


예를 들어 그의 이론에서는 기존의 반영 이론이나 리얼리즘 이론 같은 틀은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문학과 정치적·사회적 현실 사이의 매개를 헤겔이나 루카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명한다. 이 책 전체가 헤겔에게서 연원하고 루카치에게서 발전하는 문학 이론을 멀리 다윈에게서 발원하고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뜻밖의 응원군이 나타나며 스티븐 제이 굴드에게서 정교화되는 진화론으로 전복시키려는 논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동시에 모레티가 그러한 점진주의적 진화론 또는 문화는 ‘정신의 표현’(예를 들어 부르주아 소설가는 눈먼 시계공이 아니라 길 잃은 시대에 길 찾는 자이다)이라는 입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항군인 벤야민-슈미트 연합군의 결단-예외상태론을 이 책에서 상세히 비판하는 이중 전선을 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이다(이것은 벤야민-슈미트 논의가 한창 유행중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 지식계에 모레티의 이 책이 성찰적으로 수용돼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형준 번역가
필자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영문학)을 수료했다. 2012~2013년에는 콜롬비아대 방문연구원으로 있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람시의 『그람시와 함께 읽는 문화』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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