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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교차하는 역사성… 복잡성 의식으로 루쉰 분석
두 개의 교차하는 역사성… 복잡성 의식으로 루쉰 분석
  • 교수신문
  • 승인 2014.07.0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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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의 루쉰 읽기』 왕후이 지음|송인재 옮김|글항아리|572쪽|30,000원

 

청년학자 왕후이는 루쉰의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과 계시를 받아 루쉰 연구를 진행했고 기존 중국의 루쉰 연구를 뛰어넘는 발자취를 남겼다.
왕후이는 그후 20년 가까이 사상사 연구로의 전향을 거쳐 다시 루쉰에 눈을 돌리고 있다. 못 다룬 1930년대 루쉰의 문화정치 등은 과제다
.

이 책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역사성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루쉰의 역사성이고 다른 하나는 왕후이 루쉰 서술의 역사성이다. 루쉰의 역사성은 그의 작품, 사상, 생애의 역사성이다. 그것은 루쉰이 목격하고 이미지한 시대상을 통해 파악되며, 그 안에 깃든 당시 지식의 분위기, 즉 슈티르너, 쇼펜하우어, 니체, 키르케고르, 안드레예프, 아르치바셰프, 구리야가와 하쿠손 등의 영향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루쉰 서술의 역사성은 1980년대 중국 지식계를 휩쓴 사상해방 조류의 흔적을 통해 나타난다. 왕후이가 이론적 참조체계로 삼는 실존주의, 해석학, 정신분석학, 리쩌허우·린위성의 사상사 이론, 벨린스키·르네 웰렉 등의 문학이론 등은 모두 이 시기 사상해방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 역사성에는 연결 고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계몽주의에 대한 회의다. 그것은 20세기 초 루쉰이 접한 사상 조류와 1980년대 왕후이가 루쉰을 연구하면서 주목한 사상자원의 접점이자 왕후이 자신이 취한 루쉰 연구의 기본 관점이다. 이 관점은 왕후이가 혁명 이데올로기, 계몽주의, 휴머니즘, 결정론 등 정치·문예 이론에 의해 루쉰을 선험적으로 파단하고 임의로 재단하는 그 이전의 루쉰 연구를 딛고 일어서는 발판이 됐다. 이에 중국의 원로 왕푸런은 왕후이의 연구를 “서구의 이성 전통과 비이성 전통 사이에서 루쉰의 정신구조 속의 모순적 요소를 서술한 인생철학파의 대표작”이며 “계몽주의적 루쉰 이해보다 더 돋보였다”라고 평가했다. 1988년에 완성된 이 책은 그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문화: 중국과 세계’ 총서로의 출판을 제안 받았으나 시대적 상황으로 좌절됐다.

그후 대만과 중국에서 결국 출판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개정판이 나온 2008년 이후에는 저자의 유명세와 영향력의 덕(?)에 표절논란에도 휩싸였다. 이렇게 왕후이의 루쉰 연구는 역사성을 띠는 동시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자신의 역사도 갖게 됐다. 근대 혁명과 계몽주의의 지반위에서 선험적으로 재단된 루쉰을 구하려는 노력은 루쉰의 복잡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구현된다. 그 결과 그려진 루쉰의 형상은 어떤 명료함이나 단일성보다는 복잡성과 혼존성을 띤다. 루쉰 문학세계에서 표상된 모순적 정신구조를 지칭하는 ‘역사적 중간물’은 이런 탐색을 결산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쉰 소설은 ‘중간물 의식 위에 세워진 방사체’다. 현실의 모순과 그런 현실을 비판하지만 그 안에서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자신의 모순을 동시에 떠안은 ‘역사적 중간물’이 택한 인생의 길은 ‘절망에 반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戰士의 길이다. 그렇지만 그 전사의 길은 우렁찬 구호나 비장한 각오로 무장돼 있지 않다. 그 대신 어두움, 고독함, 적막감, 음산함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이것이 스스로를 ‘암흑의 갑문’을 짊어진 사람에 비유한 루쉰이 현실과 싸우고 자신과 대면하는 방식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정신구조는 이렇게 비관과 낙관, 절망과 희망 사이에 있는 개체의 항전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문학주체와 ‘절망에 반항’하는 인생철학은 긴밀히 얽혀 있다.


‘역사적 중간물’로 표현되는 복잡성 의식은 근대 혁명이데올로기나 계몽주의가 표방했던 어떤 구호의 선명성이나 사상의 명료성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낸다. 그것은 비단 루쉰 연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명이나 목적의식 하에 현실과 역사를 과도하게 단순화해서 이원대립구도나 앙상한 이상만을 제시하는 사상적·정치적 경향에도 도전하고 있다. 복잡성이 내포한 불명료함은 낯선 표상방식을 띠겠지만 오히려 그 불명료함이 그 이전의 명료함을 부정확한 것으로, 그 낯선 표상방식이 명료함을 뛰어넘는 명료함을 탄생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이러한 루쉰 읽기는 80년대 중국 사상계의 주류처럼 간주되는 계몽 기획에 맞서 계몽성찰의 계기를 이룬다는 역사성을 지닌다.


복잡성의 탐색은 이처럼 사상사적 의미를 강하게 갖지만 그 과정은 그 이전의 선험적 루쉰 연구에서 그랬듯 단순히 루쉰이나 왕후이가 접한 지식자원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루쉰의 문화철학이나 인생철학을 논하는 배경으로 슈티르너, 키르케고르, 니체 등의 철학이나 레벤슨, 리쩌허우, 린위성 등의 근대사상사가 거론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경이다. 루쉰의 정신 세계는 루쉰의 감성적 표현방식에 착안해서 차례차례 그려진다. 그래서 책에서는 격정 유형(감상성, 풍자와 유머), 이미지(침묵, 식인, 황야, 이미지) 등에 주목한다. 그것은 다수의 작품에 천착해서 일관된 몇 가지 경향들을 추출한 결과이다. 아울러 적재적소에서 루쉰 특유의 짧고 강렬한 언어를 제시함으로써 루쉰 문학의 강렬한 실존성과 음산함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으로 문언과 백화, 간결함과 장황함 등으로 나타나는 문체와 수사방식 등 루쉰 소설의 언어적 특징을 분석하면서 형식과 내용의 긴밀한 연관도 논하고 있다. 왕후이의 지도교수가 문학적 특징보다 철학적 특징이 강하다는 의견을 냈고 이에 서사원칙과 서사방법에 관한 서술을 새롭게 추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책 전체에서는 분명 엄격한 체계나 개념, 논리가 아닌 이미지나 격정양식에 주목함으로써 루쉰의 문학적 기반에 의해 그의 정신세계와 사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루쉰의 언어를 독자와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중간물의 절망적 항전에 감정이입을 하는 기제도 마련하고 있다.

왕후이가 루쉰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일단락지은 1980년대 후반 중국의 루쉰 연구는 퇴조기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학자 왕후이는 루쉰의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과 계시를 받아 루쉰 연구를 진행했고 기존 중국의 루쉰 연구를 뛰어넘는 발자취를 남겼다. 왕후이는 그후 20년 가까이 사상사 연구로의 전향을 거쳐 다시 루쉰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 책에서 못 다룬 1930년대 루쉰의 문화정치, 루쉰이 그려낸 유령·귀신 이미지를 통한 근대와의 대면 등이 새로운 과제다. 이렇듯 30년 가까이 된 『절망에 반항하라』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고, 그 속에서 ‘절망에 반항하는’ 인생철학과 절망적 현실에 끊임없이 맞서야 하는 현대인의 교감 가능성도 여전히 살아있다.

 


송인재 한림대 HK연구교수·동양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사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집필과 번역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아시아는 세계다』,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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