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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
  • 우덕찬 부산외대·러시아중앙아시아학부
  • 승인 2014.07.0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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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19_ 비잔틴 건축의 총화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


▲ 펜덴티브 구조로 지어진 아야 소피아의 돔 내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원명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 거룩한 지혜)이고 현지 터키어로는 아야 소피아(Aya Sofya)라고 불린다. 여기서 소피아(Sofia)라는 이름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초기 동방기독교의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역할을 주관하는 존재로서의 하느님 어머니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성당은 오랜 시일이 경과됐음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학상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the Cathedral of Seville)이 완성될 때까지 거의 1천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지금의 건축물은 3번째로 축조된 건물로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재위 527~565)의 명에 따라 기원후 532년에 축조를 시작해서 5년 만인 537년에 완성됐다. 원래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360년에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 황제 때 화재로 소실됐다.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Ⅱ, 재위 408~450) 치세인 415년에 이르러서야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됐다. 그러나 이 성당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 니카(Nika)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고 말았다.

화재와 정변 속에 세워진 당대 최고의 교회
니카의 반란은 532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무정부 상태로 빠뜨렸던 반란이다. 즉위 이전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의 정치적·종교적 정책을 지지하는 민중그룹인 청파(factio veneta)를 보호하고, 녹파(factio prasina)와 대립했지만, 제위에 오르자 정치적 압력과 부담으로 여겨진 당파행위를 탄압하게 됐다. 532년 1월 10일 대경기장에서 청·녹파 간에 싸움이 벌어져 처형자가 나왔는데,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한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경기가 끝난 뒤 양파가 합류해 ‘니카(승리)’를 구호로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소란에 편승해 반황제파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Ⅰ, 재위 491~518)의 조카인 히파티오스(Hypatius)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트라키아로 가려고 했으나,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으로 생각을 바꾸고 반황제파를 급습해 난을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은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Anthemius)와 수학자 이시도르(Isidore)를 성당 축조에 참여시켰다. 이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구석구석에서 재료를 조달해 왔다.


이 건축에 동원된 장인은 100여 명, 노동자는 1만 명이 넘었으며 황금 90톤의 비용을 들여 건축했다고 한다. 처음 성 소피아 성당이 완성됐을 때의 높이는 55m였다. 그러나 축조된 지 얼마 안 돼 성당 중앙의 돔이 지진에 의해 무너지게 됐다. 이후 보수공사로 돔의 높이가 조금 더 높아져 55.6m가 됐고 오늘날까지 그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당대에 현존하는 최고의 교회를 짓기 원했기 때문에 귀중한 건축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동원했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당은 축조한 지 5년 10개월 만에 완성돼 537년 12월 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헌당식에 참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 내부의 화려함을 보고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라고 소리쳤다고 전한다.


또한 이 성당의 화려함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궁중시인인 파울루스(Paulus)는 소피아 대성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쪽의 반원과 서쪽의 반원에 의해 형성되는 성당의 중심부 주변에는 네 개의 힘찬 석재 피어(pier)가 서 있으며, 이들로부터 거대한 아치가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Iris)의 활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 아치들은 공중으로 서서히 솟으면서 서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 사이의 공간은 놀라운 기술로 채워지고 있다. 벽면은 아치에 접하면서 계속 펼쳐져 아치 상부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돔의 기단부는 거대한 아치에 고정돼 있으며, 이 돔은 마치 광휘에 뒤덮인 천상과도 같이 성당을 감싸고 있다.”

회칠로 덮인 황금 벽화에서 오늘날 박물관이 되기까지
성당 내부의 백미는 수세기에 걸쳐 장식된 모자이크에 있는데 성모 마리아, 예수, 기독교의 성자들,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묘사돼 있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iconoclasm) 때에 없어져 버렸다. 이어 제4차 십자군 원정기간인 1204년 라틴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을 자행했는데, 비잔틴제국의 보물들뿐만 아니라 당시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들도 약탈해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소피아 성당의 화려함에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 제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이 성당은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됐다. 성당 내부의 화려한 황금 모자이크들은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로 인해 회칠 속에 가려지게 됐다. 하지만 17세기 이 성당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은 예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는데,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보면 회칠 작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됐다고 보인다.


이후 1930년대 토마스 휘트모어(Thomas Whittemore)가 이끄는 미국 비잔틴연구소(Byzantine Institute) 고고학자들의 복원작업으로 오랜 시기 석회칠로 덮여 있던 모자이크 벽화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성립 후,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는 이 성당을 1934년 인류 모두의 공동 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u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우덕찬 부산외대·러시아중앙아시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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