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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은 계속된다
레슬링은 계속된다
  •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 승인 2014.06.3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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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_우리는 생각한다

▲ 이창남 서평위원
일본 도시샤(同志社)大의 이타가키 류타 교수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기억의 장』이라는 책이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북한, 일본에서 서로 다르게 정형화된 레슬러 역도산에 관한 기억을 다루는 장을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흥미로운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세대에게 역도산은 이미 전설 속의 인물이다. 그러나 류타 교수의 글을 보니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김일, 천규덕, 장용철 같은 레슬러들의 원조가 역도산이었다. 지금도 이들이 안토니오 이노끼를 비롯한 일본인 레슬러들과 맞수를 이뤄 경기하던 장면은 생생하다. 일본선수들의 비겁한 반칙에 고전하던 천규덕은 막판에 상대를 링으로 튕긴 후에 당수로 쓰러뜨린다. 김일 역시 경기 초 중반에는 일본선수들에게 고전하곤 한다. 하지만 막판에 자신의 필살기 박치기로 상황을 종료시키곤 했다.

거구에 긴 턱을 가진 안토니오 이노끼의 악마적 위용도 김일의 박치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김일 선수, 박치기!, 박치기!”하던 아나운서의 열광적 목소리에 당시 초등학생이던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링을 지켜보았다. 옆동네 아이들과 가끔 박치기로 승부했을 정도로 김일의 박치기는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했다. 김일이 사망한 뒤, 유럽의 부자 나라 프랑스에서 그의 두개골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가져간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을 때 흡사 국가기밀이라도 누설될까 조바심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도 우리들의 필살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못 자랑스럽기도 했다.

중원 진출을 꿈꾸며 무협지를 탐독하던 중고교 시절에는 이미 『무림일기』의 저자 유하의 말 대로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원정간 한국 레슬러들이, 일본 레슬러들이 우리나라에서 하듯 상대의 얼굴을 이빨로 물어뜯는다든지, 무기를 팬티 안에 숨기고 들어온다든지 하는 행태를 똑같이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리고 레슬링은 어느날  소리소문 없이 끝났다.

하지만 요즘도 한·일간의 과거사와 관련된 논란들을 보면 레슬링은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한국근대사에 대해 전문적 소견을 제시할 입장은 못 된다. 그리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1970년대 이후 그것이 어떻게 교실과 안방에 알려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일로 치부할 생각도 없다. 그 기본 정조는 1970~80년대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소송에 휘말렸고, 정부는 위안부 백서를 준비하는가 하면, 메이저 언론들은 위안부 문제를 주권적 존엄의 문제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물론 한·일 과거사 문제의 논의를 진척시키고, 두 나라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우고 반민족 감정을 덧칠하면 게임은 이미 끝이다.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한 차분하고 냉철한 과거사 논의보다는 천규덕의 당수와 김일의 박치기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이런 싸움은 흥행에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미래는 없다. 이 와중에 한국의 반일감정이 일본의 혐한감정을 부추기고 거기서 일본의 우파정부가 덕을 보고 있다. 일본의 한류 거리들은 空洞化 되고, 일본정부는 자위권을 확대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린다.

정의도 역사적이다. 국내에서 과거 저항민족주의의 의의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영원히 정의로운 것일 수 없으며, 국경을 넘나들며 엮어졌던 과거사의 면면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패러다임도 아니다. 미래를 염두에 둘 때 무엇보다 이를 기저로 하는 청소년 세대의 과거사 이해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사는 세계는 과거와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의식은 여전히 과거적 정의의 틀 속에 붙들려 종종 시대착오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과거사에 대한 경직된 이해가 청소년 세대에게 전수되면서 역사는 정체되고, 미래는 계속 유예되는 것이다. 변화된 시대를 숙고하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정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책임이 작지 않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미래의 짐이 돼 돌아올 것이다. 일본인 리키도잔, 한국인 역도산, 조선인 력도산으로 양식화 돼왔던 한 레슬러에 대한 개별 국가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개별 국민국가의 일국적 틀 속에 머물러 있는 정의의 지평도 이제는 초국적 차원에서 새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권하고 싶다. 레슬링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다. 더 넓은 링에서 고민하자는 것이다.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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