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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나나쓰다테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은폐된 나나쓰다테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 김정훈 전남과학대·일문학
  • 승인 2014.06.25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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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쓰다테 사건 70주년 추도식 및 심포지엄 참관기

일본 현지에서 열린 나나쓰다테 사건 70주년 추도식에서 일본 대표의 참배 모습이다.
 최근 ‘나나쓰다테 사건’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난 5월 3일 대구 한일심포지엄에 이어 5월 29일 아키타현 오다테시에서 열린 심포지엄 석상에서 일본 민족예술연구소 차타니 주로쿠 전 소장이 ‘나나쓰다테 갱 함몰재해보고서’ 등 중요한 자료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 광산에 불가항력의 함몰사건이 발생, 당시 갱내 작업 중인 22명이 희생됐다. 당시 지층이 대단히 불안정하고 위험해서 광산 감독국 의견으로 사체발굴 작업을 중단했다.

  둘째, 사건 당시 희생자에 대해서는 모든 조취를 취했고 장의, 조의 등을 완료했다.

  셋째, 하지만 최근 하나오카 거주 조선인 25명이 본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 회사에 자신들의 고용을 요구하고, 현재의 임금에 준해 수정해서 당시 임금을 지불하라는 등의 무법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넷째, 최근 지역 경찰에게서 연락받은 사항인데, 왠 조선인 단체가 본건에 대해 1월 중 외무성, 한국대표부 등에 진정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기에 사전에 외무성에 본건의 경위를 알리기 위해 오늘 자료를 지참했다.

  이 내용은, 1955년 1월 11일 동화광업 모리타 도라오(森田?男) 상무, 하타자와 교이치(畑?恭一) 총무부장이 외무성을 방문해 제시한 자료와 설명을 외무성 아시아국 제5과에서 정리한 것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동화광업 측에서는 발굴작업을 중단했지만, 사체발굴을 하겠다는 의사를 외무성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에게 사체발굴을 할 의사가 있었을까? 아니면 조선인 단체가 진정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그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려고 외무성에 허위보고를 한 것일까? 결과적으로 사체발굴은 하지 않았다.

  또한 葬儀, 조의를 완료했지만, 하나오카 거주 조선인들이 회사 측의 처리에 불만을 지니고 이의를 제기하며 여러 요구를 한 사실은 당시 이 사건이 원만하게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도대체 왜 동화광업은 유골발굴을 하지 않았을까. 인명보다는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증산을, 갱내 복지와 안전보다는 인명 피해와 갱 함몰을 각오하고 난굴을 일삼으며, 군수대신 도조 히데키, 군수차관 기시 노부스케, 제국광업주식회사 사장 수가 레노스케에 대한 충성을 제1의 가치로 삼던 회사가 아니던가. 국책회사 제국광업개발주식회사의 지배하에 군수성의 명령에 따르던 악덕기업이었던 만큼 쉬쉬하고 사건 뒤덮기에만 혈안이었지 애초부터 유골발굴을 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추도식 후 심포지엄이 열린 장소는 하나오카 공민관. ‘하나오카 일중 전쟁반대 우호비를 지키는 모임’을 대표해 ‘하나오카 광산과 조선인’이라는 제목으로 첫 발제에 나선 도가시 야수오(富?康雄) 씨는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을 정당화, 미화하는 움직임’에 대해 경고하고, 강제연행, 강제노동 사건에 대해 한국, 중국 사법부가 일본기업에 배상을 명하는 판결이 이어지는 현실을 주목, “인도법 견지에서 평화재구축이 큰 흐름인 현시점에서 일본정부나 기업에 그것(배상)을 기대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그 순간 필자는 근로정신대 피해소송 건을 떠올렸다. 광주에서는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항소심 재판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분들과 법정에 함께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터였다. 도가시 씨의 발표를 듣자 미쓰비시 불매운동 현장과 피해자 할머니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정치와 자본권력의 결탁구조는 아베정권이 들어선 뒤 심화됐다. 허나 조금도 인도적 견지에서 피해자 문제를 성찰하지 않는 미쓰비시나 동화광업은 철면피다.  

  필자는 마지막 발제자로 나서 ‘마쓰다 도키코 「땅밑의 사람들」의 나나쓰다테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작품에는 나나쓰다테 사건을 계기로 한인 징용자와 일본 노동자가 단합해 일본제국주의 하수인들을 물리치고 복수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스토리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한일 노동자의 적극적인 연대 장면도 심화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런 과정을 추적하며 작가의도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한국인 징용자 11명과 일본인 노동자 11명이 생매장당한 나나쓰다테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경북 청도군 출신의 박재덕 씨(일본명 新井有?) 소식도 알리며 강제동원피해조사위 협조 하에 박재덕 씨의 유족(조카. 부산 거주)과 전화 통화한 사실도 밝혔다.

  조카의 증언에 의하면 구출 당시 28세였던 박재덕 씨는 해방 후 귀향했으나 나나쓰다테 사건의 트라우마와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3년 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청중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곤거리는 순간 그 자리에 참가한 모든 이가 나나쓰다테 사건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공유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만년까지 「어는 갱도에서」라는 작품으로 나나쓰다테 사건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맘을 표현한 마쓰다 도키코는 탐방기 「하나오카 광산을 찾아서」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조선 동포 앞에서도, 중국 젊은이 앞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수긍하면서 그 일본인 자신이 일본제국주의 전범의 비행을 말살시킴에 있어서 얼마나 미력한가를 깨닫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유족과 동반 탑승한 필자는 아키타에서 멀어지는 귀국편 기내에서 70주년 추도식과 심포지엄을 주최하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귀를 되뇌었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
일본 간사이가쿠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소세키(漱石)와 조선』,『 소세키(漱石) 남성의언사·여성의처사』, 논문으로「마쓰다 도키코‘하나오카 사건 각서’고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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