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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와 안전사회
위험사회와 안전사회
  • 권경우 문화평론가 ·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승인 2014.06.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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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권경우 문화평론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됐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에 대한 책임과 대책을 강구한다는 명목으로 안전을 강조하면서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그 중 안전행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축소하고 소방방재청을 포괄하는 ‘국가안전처’를 신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겉으로는 재난안전의 전문성과 현장 대응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소방방재청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소방방재청의 독립성이 훼손당함으로써 오히려 재난안전과 현장대응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소방대원들이 1인 시위에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분명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다. 단순한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재난’이라는 단어가 일상화됐다. 또한 사회적 혹은 자연적 재난을 둘러싸고 온갖 수익사업들이 거대한 산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가리켜 ‘재난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언딘’이라는 민간인양전문업체가 인명 구조를 전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러한 양상이 바로 일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영화의 실체다. 재난자본주의는 이처럼 우리 사회가 필연적으로 양산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부스러기들을 먹고 성장하는 시스템이다.

이미 20세기 후반 자본주의는 ‘위험사회’로서의 특징들을 드러낸 바 있다. 우리 사회만 하더라도 삼풍백화점와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등은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러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의 삶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들었던 기술과 공학의 발달은 다른 한편 ‘위험사회’의 조건들을 증가시켰고 강화시켰다. 실제로 위험사회에 대한 경고가 등장한 이후 위험은 줄어들었다기보다는 위험의 잠재성이 더욱 증폭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제 ‘위험’이라는 공격적인 상황은 ‘안전’이라는 수비 대책과 상호 대비를 이루고 있다. 대중은 일상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그 위험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이념의 차이나 경제적 이익을 넘어 또 다른 차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강력한 사회적 기제가 되고 있다. 위험은 안전을 강화하고 안전은 위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확산한다. 그렇게 위험과 안전은 대립적인 한 쌍으로 존재확인을 하고 있다. 위험이 사라진 안전사회는 과거 착취가 사라진 평등 사회처럼 일종의 유토피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안전한 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근대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형성된 ‘안전율’의 개념은 완전한 것은 없으며 안전하다는 것은 결국 일종의 근사치로 표현하는 평균값에 해당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의학에서의 질병 예방이나 식품 안전의 문제 역시 완벽한 것이라기보다는 점차 확률을 높이는 것에 불과하다. 절대나 완전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안전’의 영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단어다. 그런 점에서 안전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적 욕망은, 그것이 설령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배타적 거부라는 전제 위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다.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이 더 이상 그 자체의 소박한 욕망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전을 강조할수록 위험의 공포는 커지고 우리의 자유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안전의 또 다른 얼굴은 감시와 검열이 되고 만다. 나아가 안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시민들은 상호간의 자율통제를 완성시킬 것이다. 안전은 말 잘 듣는 ‘착한 시민’을 무더기로 양산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안전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고, 노란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안전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고,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시위와 집회에서 경찰의 해산방송을 잘 따르는 것이다. 안전은 지성과 교육이 실종된 대학에서 조용히 졸업장을 따서 나오는 것이고,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외치는 것이다. 또한 안전은 집이 없는 서민이 집값 폭락에 따른 부동산시장의 불안정을 걱정해서 집값 걱정을 하는 것이다. 안전은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과 경남 밀양의 할매들과 쌍용자동차 및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눈물이 아니라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 후쿠시마를 통해 직접 알게 된 원전의 위험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실제적으로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지하고 감수하는 능력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나 다리의 붕괴를 진단하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리왕산의 숲과 나무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는 것을 포괄한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할 때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는지 아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다.?나아가 안전을 위반하고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삶은 안전지대를 넘어설 때에야 혁명과 조우한다.

권경우  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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