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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학문의 식민지성과 탈식민지성
[특별기고] 한국학문의 식민지성과 탈식민지성
  • 윤건차 가나가와대
  • 승인 2001.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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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과제 외면하는 90년대… 탈식민화, 역사와 구조 성찰서 싹터

한국의 학계에서는 지금 외국 학문에 대한 의존도가 도를 지나쳐서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느 시대나 외국으로부터 배워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세계의 모든 나라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본의 식민지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여러 외국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리고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학문의 근본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먼저 ‘학문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학문도 있을 것이다. 혹은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로 학문을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외국 학문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 대한 염려는 역시 외국에서 들여온 학문이 한국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나 미래를 전망하는 사회진보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진보를 저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면 학문의 목적이나 방법이 확실한 상태라면 외국의 학문을 아무리 많이 배워 온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에서는 활발한 외국 학문의 수용이 한국 사회의 욕구와 어딘가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의 ‘탈근대’는 ‘탈식민주의’ 수반하는가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학문, 특히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란 어떤 것인가’가 문제로 부각된다. 이는 당연히 ‘한국 사회의 역사와 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충분히 성숙해 있고 개선돼야 할 점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학문은 스스로 현상유지와 기득권 옹호를 위한 보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많은 변혁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면 그에 적합한 변혁의 학문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한국에서는 반공의 옷을 입은 자유주의나 기득권 옹호의 보수주의, 나아가서 자민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등을 비판하면서 한국 사회의 진보, 변혁의 목표를 모색해야 나가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과제가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구조를 적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한국 사회를 역사적·구조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근대’라는 시대는 서구 근대의 ‘보편주의’에 의해 크게 규정되는 것인데, 이와 동시에 서구 근대의 ‘보편주의’는 타자를 억압겺㎎쳛차별하는 ‘식민주의’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근에 유행하는 ‘탈근대’의 과제는 실제로는 ‘탈식민주의’와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서구 여러 나라나 일본 등의 ‘선진국’은 근대가 초래한 여성 차별이나 환경 파괴, 소수자 배제 등의 탈근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 해결이란 동시에 이전의 억압겺㎎쳛차별이라는 식민지주의적 행위를 반성·사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한편, 근대에 식민지 또는 半식민지였던 나라나 지역에서는 서구 근대가 획득한 긍정적인 인간적 가치를 확보하는데 노력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선진국’의 식민지주의에 의해 야기된 마이너스의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이다. 당연히 그러한 노력은 근대의 달성을 지향하는 것과 함께 근대가 해결할 수 없는 탈근대적 과제에도 동시적으로 대처해 가는 것이 된다. 한국의 학문에 있어서 그 과제는 식민지근대의 과거와 현재를 냉철히 응시하면서 남북통일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을 이끌어가는 형태로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한국의 학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의 역사적겚망뗌?특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의 역사적겚망뗌?특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와 ‘해방’ 후의 남북분단이다. 학자나 사상가는 각각 다른 사고를 하고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한국의 근현대사가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특질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특질의 모순이나 문제점의 해결을 진지하게 고찰한다면 외국 학문을 과도하게 배우는 행태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외국 학문에 대한 의존도가 도를 지나쳐서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은 외국 학문을 배우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규정하고 있는 식민지와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이후에 그 당시까지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조가 분화돼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사상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현상은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실제로 당시까지 경시돼 왔던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 소수자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러한 문제의 중요성도 명백해졌다. 개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운동도 활발해져서 한국 사회가 성숙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도 분명하다. 거기에 푸코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90년대의 사상 흐름을 관찰해 보면, 그러한 탈근대적 요소를 띤 사상의 활동은 반드시 80년대 한국의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의미를 가졌던 80년대 한국은 反독재곙柴셉╂?민주화투쟁의 시대였는데, 이는 보다 큰 의미에서는 민주주의를 전진시키고 나아가 통일을 성취시킴으로써 한국에서 미완의 근대를 조금이라도 완성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사상적 접맥 필요

거기에는 민족이나 계급, 국가가 문제로 부각되고 통일의 달성은 그러한 사회과학적 개념의 총화적 의의를 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90년대 한국의 사상 흐름에서는 탈근대적 지향이 커다란 위치를 점함으로써 민족이나 계급, 국가의 문제가 뒤로 밀려나고 사고의식에서 탈정치화가 끊임없이 진행돼 이제는 한국 사회의 기본적 모순이 그다지 자각되지 않을 정도가 돼 버린 듯하다. 푸코도 좋고 들뢰즈도 좋다. 사이드나 기든스를 공부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들을 공부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의 진보에 있는 것이다. 90년대에 모처럼 배운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 소수자 문제 등을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로 음미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민족이나 계급, 국가 그리고 통일 등의 문제에 다시 의문을 던지는 노력을 한다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한국의 미래상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바깥에서 보고 있으면 한국의 지식인은 세계에서도 매우 드물 정도로 근면하고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지식을 흡수하려는 정열은 정말로 대단하다. 세계의 모순을 직접 느끼는 입장에 놓여있기 때문이겠지만 실제로 한국의 지식인은 단순히 한국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의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지적 활동을 촉구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사실,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사상의 행보는 압축근대곀畸뮈【?놀라울만한 고뇌의 누적을 나타내면서도 계속되는 좌절을 극복하고 곤란에 당당히 맞서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단국가 지식인의 ‘행운’

한국이 분단국가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지식인에게 결코 불행한 일은 아니다. 그만큼 세계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의 통일도 분리돼 있는 남과 북이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과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또한 ‘탈근대=탈식민지주의 속에서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민족주의’ 내지는 ‘탈민족주의’ 사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라는 과제도 생각해야 한다.

포스트주의에서 곧잘 논의되는 ‘탈국민국가’도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 대부분은 ‘탈국가주의’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전의 종주국이었던 일본이 과거청산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동아시아의 미래에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의 지식인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솔선해서 이끌어 나갈 패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거듭 말하지만 외국의 학문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주체성이 확실하다면 외국의 학문은 아무리 많이 배운다고 해도 지나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각과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각각 고립 분산돼 배운다고 할지라도 가끔은 서로의 의견이나 사상을 저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하고 손을 맞잡고 현실의 문제에 대처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90년대 시민운동의 전개는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해외에 있는 동포도 이에 함께 참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번역 장화경/성공회대·일본학

□ 약력: 1944년 교토 生. 도쿄대 교육학 박사. 가나가와대 일본근대사상사, 한국 현대사상사, 근대 한일관계사 전공 교수. 번역된 저서로 『현대 일본의 역사의식』(한길사, 1990),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당대, 2000) 등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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