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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강박에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용기
책 읽기의 강박에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용기
  • 교수신문
  • 승인 2014.06.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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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 학생이 수업게시판에 ‘어제 읽은 좋은 글’이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글을 소개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 쬐다가, 얻어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몽테뉴).” 아마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온 글인 듯하다. 대학시절 나도 탐독했던 책 가운데 하나다. 그 학생은 “학우분들 모두! 이수업에서 조그마한 불씨라도 다 가져 가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끝맺었다. 맞는 말이다.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 말은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나는 다른 맥락에서 숙고해본다.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교육할 필요가 없다. 교육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반대로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교육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몽테뉴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풍부하고 화려한 지식을 배워도 마치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갔다가 잠시 불구경하고 돌아오는 사람처럼, 그 지식을 체화하지 못한 채 흘려보낼 따름이기 때문이다. 불을 얻으러 갈 때 마음이 절박하거나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다면 구경만 하다 잊어먹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고 수업을 끝냈다.


그날 한 학생의 글이 올라왔다. “교육은 부차적인 것이지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교육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다고 하신 말씀에 정말 동의했어요.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이 글에 또 다른 학생이 댓글을 달았다. “OO씨 댓글 읽고 떠오른 생각인데, 저도 드림클래스 강사를 하면서 정말 바닥까지 공부의지가 없는 아이들을 보고,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많이 고민했었어요. 교수님께서 오늘 하셨던 말씀에 한편으로는 저도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대학생 강사가 있는 것인데, 그 활동들이 아이들에게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나는 댓글을 달았다. “흠. 여러분도 어떤 의미에서 ‘정말 바닥까지 공부의지가 없는 아이들’ 아닌가요? 하하. 네. 맞아요. ‘그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대학생 강사가 있는’ 것이고 여러분을 위해 교수가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교육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민한 사람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맞아요. 물론 여기에도 변증법이 작동합니다. 명민한 머리를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명민하기는 한데 저 좋은 머리를 다른 데 쓰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도 많지요.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바로 이것, 교육은 스스로 하는 건데, 바로 스스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교육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첨언했다. “교육에서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피교육자)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변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변한 사람을 보았을 때다. 말로, 지식으로,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에너지는 타고나는 것 같다. 같은 부모를 둔 쌍둥이조차 열정과 호기심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호기심은 가르칠 수 없다. 교육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렇지만 위에 말했듯이 충격적 체험을 하는 특별한 순간에 사람들이 변할 소지는 있다. 또한 어렵지만 습관을 통해 변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정도로는 책읽기의 상황에도 해당한다. 책읽기는 사랑하기와 비슷한데, 둘은 무엇보다 감정노동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의 행위는 자아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왜냐하면 자아의 리비도를 끊임없이 대상에 쏟아 부으면서 자아가 빈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버티는 이유는 대상이 조금이나마 그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짝사랑은 응답이 없는 사랑이기에 위험하다. 사람들이 책읽기라는 감정과 신체의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사랑의 행위처럼 책 읽은 뒤에 느끼는 성취감과 뿌듯함 때문이다. 그 즐거움이 다른 어떤 고통도 능가하기에 사람은 책을 집어 든다. 게다가 책읽기는 짝사랑의 위험도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다. 그 호기심이 열정으로 바뀌고 그 열정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축적된 것이 그 사람의 지식과 의지를 키우고 결국 능력과 태도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뜻 책을 집어 들기 어려워하고 자신의 게으름을 잘 알고 있으며 책을 읽을 여건과 환경 또한 열악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자신을 독서모임 같은 강박에 집어넣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책읽기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고 책읽기를 습관으로 만들 수 있다. 습관이 됐다는 것은, 교육처럼,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습관을 젊은 나이에 들일수록 좋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자신을 강박에 집어넣을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물음이 남는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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