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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상상력으로 조선의 지성사와 세계관 분석
지리적 상상력으로 조선의 지성사와 세계관 분석
  • 교수신문
  • 승인 2014.06.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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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조선과 중화: 조선이 꿈꾸고 상상한 세계와 문명』 배우성 지음|돌베개|615쪽|40,000원

이 책은 중화를 자주나 사대의 어느 한편에 배정하거나, 본질주의적으로 긍정·부정하는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행연구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당대의 지성사적 지형을 설명할 수 없다.


현재를 향한 역사가의 로망은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했던 전근대 역사가들은 물론, 민족과 국가, 나아가 민중을 위한 역사를 쓰려 했던 근대 역사가들도 과거를 현재와 동일시해 온 방식의 정당성에 대해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역사학이 과학과 문학 중 어느 쪽과 더 가까운지 묻는다고 해서, 혹은 ‘이제는 서발턴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과거는 늘 현실의 로망이 그대로 투영된 거울쯤으로 여겨져 왔다.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실패한 역사를 계승한 한국인에게는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대한제국의 경직성에서, 더 멀리 조선 위정자들의 비현실적 국제감각에서 원인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 현실의 한국인에게 필요한 덕목을 과거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문득 선비문화와 ‘선비다움’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21세기에도 절실하다고 느끼곤 한다. 이 모든 장면에서 과거는 현재와 동일시된다.


두 시간대를 동일시하면 공통적인 요소를 본질화하거나 긍정·부정하기는 더 쉬워진다. 신채호 이래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말해 왔던 中華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으로 간주해왔다. 중화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읽어내려는 연구가 이뤄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시도들에 의하면, 중화는 이미 조선적인 의미로 전유됐으며, ‘조선중화’로 표상되는 이 개별성에 대한 자각이 결국 한말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고 한다.


그들이 각자 그들 나름의 실천적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읽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독법의 최대치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건의 원인과 맥락을 혼동하지 않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과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낯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변수 늘리면서 맥락적으로 독해
이 책은 중화를 자주나 사대의 어느 한편에 배정하거나, 본질주의적으로 긍정·부정하는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행연구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무엇보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당대의 지성사적 지형을 설명할 수 없다. 15세기 조선에서 고유문화는 ‘자주적’이라는 이유로 높게 평가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중화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추장스럽게’ 여겨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풍토의 산물이며, 중화문화의 자장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차이일 뿐이다. 훈민정음도 그런 상황 속에서 창제됐던 것이다.


명청교체 후 조선 지식인들이 가진 중화의식의 경우는 또 어떨까. 그들은 조선이 중화문화를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한 번도 그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종휘에게 고토회복은 중화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조선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 그들이 의식한 개별성은 결코 중화세계라는 자장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조선 역사에서 중화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를 당대적 맥락에서 추적하고 성찰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책이 그 지점을 향해 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변수를 최대한 확장하여 그것들 서로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중화에 대해 자주냐 사대냐를 묻거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역사든 현실이든 그 단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얽혀 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과학은 그 변수들이 교직하는 현실을 고도로 추상화하고 이론화함으로써 그 사회를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현실을 추상화하기 위해서는 변수를 단순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재를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정책 대안을 강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중심 과제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추상화보다는 역사적 현실이 가지는 구체성과 복잡성의 맥락을 드러내 보이는 쪽을 택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학을 역사학답게, 인문학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가.


이 책이 다중의 변수를 통해 조선 역사에서 중화세계관의 층위를, 더 나아가 유동하는 결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의미의 역사’로서 철학사를 정의하는 발상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어떻게 적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상징화된 것이냐가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근의 개념사 연구들은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그런 성찰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역사학자 자신조차 문자 사료의 독점적 지위를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문자 사료는 역사학자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지성사와 세계관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로 古地圖를 활용했다.

古地圖로 접근한 역사학적 독법
고지도는 이 책에서 당대인의 지리적 상상력과 문명관이 투영된 기호로 간주된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이 기호의 상징성들을 읽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지도는 풍토의 차이와 문화의 개별성에 관한 당대인의 인식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지도에 그려진 만주는 조선 지식인들이 가진 중화에 대한 로망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일본 유구 등 ‘중화세계’의 주변지역, 나아가 지구적 규모의 넓은 세계를 묘사하는 양상은 어떤가. 그 문법은 당대인의 중화세계관과 문명의식을 어떻게 그려냈는가.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또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지도 중에는 그려진 것과 지시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다. 17세기 조선에서 유행했던 「天下圖」라는 도면에는 중국 고대 신화서인 『山海經』에서 옮겨온 지명들이 노출돼 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당시 조선에서 신선사상이 유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도면은 서구식 세계지도가 조선에서 재해석되고 전유되는 맥락을 나타내주는 기호일 뿐이다. 지리적 상상력은 중화세계관의 궤적을 따라가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다. 이 책은 지리적 상상력에 관한 역사학적 독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배우성 서울시립대·국사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 문화사와 사상사, 국제관계사와 역사지리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연구하고 있다.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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