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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반세기 만에 돌아온 마을
[딸깍발이] 반세기 만에 돌아온 마을
  • 한필원 편집기획위원/ 한남대·건축학
  • 승인 2014.06.1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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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원 편집기획위원/ 한남대·건축학
1980년대 후반, 건축 전공 대학원생으로 오래된 마을을 공부하는 나를 주변 사람들조차 의아해했다. 지도교수님은 내 장래를 염려하셨다. 내 딴에는 새로운 주거지 설계를 위한 학습으로 생각하며 연구했으나, ‘마을’ 하면 으레 과거의 이야기로 여겨졌으니 그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도 이해가 된다. 그로부터 채 20년도 되지 않아 마을과 가장 먼 지역으로 생각했던 서울의 시장이 마을 이야기를 자주 하고, 지난해 말부터 국토교통부는 한옥마을을 만들겠다며 적잖은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대반전이다.

마을이 반세기 만에 우리 사회에 돌아오고 있다. 그간 잊혔던 단어인 마을의 귀환은 반세기 동안 우리 도시를 휩쓴 아파트단지에 대한 염증과 반성에서 비롯됐다. 부동산 투기의 광풍 속에서 삶터를 돌아볼 겨를이 없던 사람들이 IMF 체제와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며 그 거품이 꺼지자 비로소 왜 이런 곳에서 사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과거 마을에 있던 것 두 가지가 없음을 발견했으리라. 자연과 공동체다.

주변의 자연과 단절된 아파트단지에서는 거의 모든 생활을 철근콘크리트벽 안에서 해야 한다. 현관과 세대 간에 벽으로 公과 私가 날카롭게 나뉜 아파트단지에는 개인이나 가족을 위한 공간은 잘 갖춰져 있지만 공동의 공간은 빈약하다. 사실 그곳에서는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리기조차 어렵다.

우리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어 은퇴 뒤에도 3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런데 노년의 가장 큰 적은 질병과 외로움이다. 같은 높이의 집들이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단지에서 또 한 세대에 달하는 긴 시간을 질병과 싸우며 외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막막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때 ‘아파트단지에 살기 전 우리는 어디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실로 오랜만에 마을을 떠올렸으리라.

오늘날까지 삶터로 이어지는 전통마을은 대개 문중사람들이 모여 살아온 씨족마을이다. 지연공동체이자 혈연공동체의 영역인 씨족마을의 공간구조는 성리학이 완성된 16세기에 정립됐다.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공부하고 일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그곳에 묻히고 모셔졌다.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이 바로 전통마을은 아닐 터이다. 21세기의 공동체는 혈연공동체가 아닐뿐더러 생활방식이 크게 달라졌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마을이 필요한가? 문제는 아직 그것을 잘 모르고 그것을 만들 줄은 더욱 모른다는 것이다. 아파트단지만 만드느라 마을을 만드는 방법과 과정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옥의 붐을 타고 서울의 은평뉴타운에도 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그곳에 지을 집은 신한옥이라 해 지난 몇 년 간의 연구를 통해 개발해 모델하우스로 지어놓았다. 그런데 마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이 기존의 단독주택지를 조성하는 방식대로 필지를 구획해 놓았다.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데는 나름의 논리와 과정이 있고 그것은 마을의 입지, 지형 등 자연 조건, 집의 유형과 긴밀히 관련되는데 아직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 전통마을은 공동체의 거주영역으로, 친환경적인 주거지로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마을에 대한 답은 아니다. 전통마을의 미덕을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의 삶의 방식에 맞는 다양한 마을의 모델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마을의 모델 별로, 땅을 다루는 방식부터 집과 마을공간이 만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마을을 설계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익혀야 한다. 지금 그런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아파트단지에 대한 대안을 눈으로 확인할 날도 멀지 않았다.

한필원 편집기획위원/ 한남대·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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