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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그 ‘숲’으로 가는 이유…冊이 머문 곳에 학자의 香氣 남는다
책들이 그 ‘숲’으로 가는 이유…冊이 머문 곳에 학자의 香氣 남는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4.06.09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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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교수 기증 도서, 열린 도서관 ‘지혜의 숲’을 가꾼다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 자리한 열린 도서관 '지혜의 숲'. 서가 높이는 6m가 넘고, 서가의 길이도 3.1km에 달한다. 출판사와 개인별 기증 코너로 분류해 책을 꽂아 뒀다. 24시간 운영하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19일 개관한다.  사진=출판도시문화재단
지난 2월 정년퇴임한 김연호 전북대 명예교수(66세ㆍ영어영문학과)는 자신의 연구인생이 담긴 3천여 권의 책을 고스란히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으로 보냈다. 셰익스피어, 희곡, 그리스 비극, 로마 극작가 전집, 연극공연학 등의 책들이다. “19세기에 나온 오래된 옛날 책들은 미국과 영국 헌책방에서 구한 책들이에요. 셰익스피어 관련 책들이 많고, 최근에 한문공부하면서 본 책 등 그동안 공부하면서 본 책들입니다. 가지고 있는 책은 모두 보냈어요. 내가 꼭 갖고 있어야 할 십여권은 복사해서 갖고 있어요.”

김 교수는 퇴임하기 2~3년 전부터 소장 도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셰익스피어 전공자를 위해 고향에 서고를 지어 보관하는 방법까지 생각했었다. “파주출판도시에서 좋은 기획으로 정부 지원도 받아 도서관을 운영한다고 해서 지혜의 숲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 싶어 기증하게 됐어요.”

한경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학부장(58세)도 지혜의 숲을 가꾸는 데 동참했다. 정년퇴임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기증한 이유가 궁금했다.

한 교수는 출판사 일조각 창업자인 한만년 선생(1925~2004)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님이 갖고 계시던 출판 관련 일어ㆍ영어 책이 꽤 있었는데, 제가 끼고 있는 것 보다 여러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들도 보탰고요.”

한 교수는 부인과 함께 수십 박스에 책을 담았는데, 정확히 몇 권정도인지는 잘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헌책방이 잘 발달돼 있지 않아서 귀한 책 중에 폐기되는 경우도 많아요. 공공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도 공간이 부족하고요. 디지털도 좋다고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잘 보관해서 어디에 두었는지만 알면 되니까. 이렇게 한데 모아서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굉장히 재밌습니다.”

100만권 목표로 ‘개인 도서’ 기증 받아

파주출판도시에 조성되는 열린 도서관 ‘지혜의 숲’은 100만권의 도서를 목표로 이미 도서 50만권을 확보했다. 이 중에서 1단계로 20만권을 비치해 놓고, 오는 19일 개관을 기다리고 있다. 서가 길이만 3.1km에 달한다. 서가 높이는 6m가 넘는다. 파주출판도시내에 있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지식연수원 겸 게스트하우스인 지지향 1층 로비에 조성돼 있다. 출판사 기증 코너와 개인 기증자 코너로 분류해 책을 꽂아 두었다. 출판사가 수십년 동안 발간한 책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고, 개인 기증자 코너에선 학자의 연구 인생과 삶을 책을 통해 볼 수 있다.

30여명의 학자와 연구자들이 이곳에 수백 권에서 수천 권까지 책을 보냈다. 석경징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유초하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한승옥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박원호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 정규섭 전 관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차균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명예교수를 비롯해 퇴임을 앞둔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병혁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기증했다. 유진태 재일 역사학자, 장순근 극지연구소 명예연구원도 함께 했다.

이형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이홍기 전 KBS 보도제작국장 등 언론인과 이병남 LG인화원 대표이사, 박우규 전 SK경영경제연구소 소장 등 재계 인사,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 등 정계 인사도 개인 도서를 기증했다.
이홍기 전 KBS 보도제작국장은 유럽에서 특파원 생활을 오래 했다. 이 전 국장은 “프랑스에는 동네문화가 있는데, 시에서도 그 지역의 저명인사나 학자의 책과 물건을 모아 보관하는 문화가 일반화돼 있다”며 책을 기증하게 된 이유를 전하기도 했다.

개인 기증자 중에는 열린 도서관 ‘지혜의 숲’을 조성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출판도시문화재단으로 연락해 기증한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귀중본은 따로 보관 … 학자의 학술전문서 우대

‘지혜의 숲’은 학자들의 연구인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책으로 조성한 개인 기증자 코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개인 기증자가 보내온 책은 우선 데이터 입력 작업을 거친 뒤 서가에 책을 꽂는 배가 작업을 하는데, 서가의 높이가 6m가 넘고, 개인 서가를 조성할 수 있는 최소 규모를 도서 300권 이상 정도로 정했다.
각종 실용서 보다는 학술전문서를 중심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혜의 숲’은 완전 개가 형태의 도서관이기 때문에 분실 우려가 있어, 개인이 기증한 도서 중 귀중본은 시건장치를 둔 곳에 따로 보관한다.

지혜의 숲 출판사 코너는 24시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개인 기증자 코너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한 학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으로 조성된 개인 기증자 코너인만큼 출판도시문화재단도 특별히 보관·보호·관리에 신중을 기한다. 개인이 기증한 코너에는 각 개인의 이름과 최종 직함이 들어간 알림판도 만든다. 지혜의 숲에는 도서 안내 역할을 하는 30여명의 ‘勸讀司’를 둬 도서관 이용을 돕는다.

이곳에 자신의 연구인생이 담긴 책을 기증할 때, 개인이 알아서 책을 옮겨 오기도 하지만, 도서 수가 많은 경우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 책을 옮기는 일을 돕기도 한다. 지금까지 개인이 기증한 사례를 보면, 적게는 300권에서 많게는 5천권까지 기증한 경우도 있는데, 보통 1천권 정도 기증을 한다고 한다. 책을 기증할 때 착불 택배로 보낼 수도 있다. ‘지혜의 숲’은 책을 통해 학자의 삶을 공유한다는 취지이기 때문에 일반 중고서점에 책을 처분하는 것과는 다르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은 도서 100만권을 비치할 목표로 연구자ㆍ학자ㆍ저술가의 개인 소장 도서를 기증받고 있다. 개인 도서 기증 문의는 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1-955-0062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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