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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 창출 관점에서 ‘여성과학리더’ 육성해야”
“새로운 지식 창출 관점에서 ‘여성과학리더’ 육성해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6.03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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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ET아카데미 오픈한 이혜숙 (재)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소장


▲ 이혜숙 소장은 1980년 3월 이화여대 수학과에 부임해서 올해 2월 정년퇴임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퀸즈대(킹스톤)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1978년에 학위를 마치고 2년 뒤 모교 강단에 섰으니, 35년을 수학과 씨름하면 살아온 셈이다. 인지과학의 권위자인 이정모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그의 학문적 동지이자, 평생의 조력자다. 2011년부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소장을 맡아 왔다. 지은 책으로는 『지식의 추구와 수학』를 비롯, 『불꽃같은 생애』·『수학을 빛낸 여성들』(번역서) 등이 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 과총 본관에 위치한 WISET 사무실에서 이혜숙 소장을 만나 여성과학리더 육성의 의미를 들었다. 사진 최익현 기자

"지금은 젠더 분석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여성 고유의 가치 융합과 공존 역할에눈을 돌려야 한다."

 


올해 정년을 했지만 이혜숙 소장이 (재)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와 인연을 맺은 것은 꽤 오래 전인 初任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WISET과 관계 맺게 된 발단은 아주 단순했다. 처음 시작은 내가 가르친 똑똑한 여학생들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런데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풀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해외의 사례들, 다른 나라는 어떻게 성공스토리를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이런 걸 공부하고 한국사회에 맞게 적용하려다보니 뜻을 같이 하는 분도 필요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의 고민을 하나씩 풀어준 것은 2002년 통과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이다. 법적 지원이란 날개를 단 그는 2011년까지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을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형태가 온전히 갖춰지지 못했던 여성과학기술인 지원 노력은 2011년 1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뒤인 2013년 1월 마침내 독립법인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지금 ‘WISET 아카데미’를 새롭게 열었다.

그런 그가 물론 업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래 『젠더 이노베이션즈』란 영문 자료를 열독하고 있었다. 정년퇴임 이후 WISET 아카데미라는 여성과학리더 육성 프로그램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이유도 이 책이 설명해준다. 여성과학리더라는 말을 들으면 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될까. 아마도 양성평등 차원에서 당위적 주장인 것처럼 흘려듣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장은 그런 당위적 접근보다는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란 관점에서, 그리고 기존 과학계의 지배적인 통념의 변화를 근거로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했다. 과학은 오랫동안 ‘뉴트럴(중립적)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과학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증거들이 특히 생명과학 분야에서 속속 제출되기 시작했다. 1997~2000년 사이, 미국 신약 시장에서 10개의 제품이 퇴출됐다. 이 10개의 약품 가운데 8개가 여성에게 부작용을 일으켰는데, 이 가운데 4개가 특히 여성들에게 좀 더 처방이 많이 됐고, 또 여성들에게 훨씬 더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판명됐다.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왜 이런 문제가 생겼나 검토한 결과, 신약 개발 당시 동물실험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루기 쉬운 수컷을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됐다는 것. XX, XY 염색체에 따라서 달라지는 여러 가지 현상이 규명되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젠더는 뉴트럴하다’는 등식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증거도 있다. 골다공증은 여성에게 많이 발병되다보니 골다공증 표준은 여성에게 맞춰져 있었다. 만일 어떤 남성이 골다공증을 앓다가 위험한 상태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여성중심 표준값에 근거해서 본다면 그가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지 확인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남성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확인할 때는 잘 작동하던 로봇이 시장에 출시돼 정작 가정주부들이 사용하게 될 때는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그렇다. 이혜숙 소장은 여성과학리더를 육성하는 일도 같다고 지적한다. 남성중심의 잣대와 표준, 통계 등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 이제 ‘젠더’는 새롭게 혁신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아주 기본적인 차이에 주목한, 유연하면서도 새로운 시선이기도 하다. 여성과학자가 남성과학자의 대안이 아니라, 이 두 젠더의 공존을 통해 새로운 시선과 지식이 마련될 때, 우리 사회와 과학 수준이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개 과학적 표준이란 게 남성들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걸 새롭게 보는 눈은 여성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과학교육 등 기존 커리큘럼 안에 이런 내용이 빌트인 돼야 한다. 그런 다음, 리더십이 왜 과학기술계 여성들에게 필요한지 재고해야 한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랫동안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자기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젠더 분석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 융합과 공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남성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새로운 부분을 여성들이 찾아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변화와 발전이 한 단계 더 다져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카데미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WISET 아카데미를 통해 사실 이런 부분을 많이 강조하려고 한다. 과거에는 여성들이 남성리더십을 공부하지 않았나. 지금은, 여성이 다르다는 것, 그 자체를 재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다른 활력과 다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일도 아카데미가 할 주요 역할이다.”

그는 지금 사회통념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대학의 역할도 강조했다. “생명과학의 경우 여학생 박사비율이 40%를 넘어선지 오래됐는데, 이 분야 여성 교수는 10%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인재 배출은 어느 정도 되고 있지만, 이제는 이들의 진출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그는 단순히 ‘머릿수’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여교수가 적다는 문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수한 여학생들에게 그들의 ‘역할 모델’이 돼줄 존재가 없다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성 연구자들은 나의 앞길은 뭔가, 이런 거에 대해 굉장히 좌절하게 된다. 그래서 대학의 여교수 리더십이 중요하다.” 이 소장이 아카데미에 ‘여성 리더십’을 강조한 배경을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바람은 단순하다. “대학에 있는 여교수들이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여교수들 스스로가 여성, 연구자, 선생이라는 삼중고를 직접 겪어왔기 때문에 여성 리더십 문제를 새롭게 고민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지금 대학이 온통 업적평가로 야단인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이 바로 여교수들의 몇 겹의 부담감이다. 대학원생에서부터 교수까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출산, 육아, 가사, 돌봄 등이다. 경쟁을 기반으로 한 업적평가에서 남성 교수들이 좀 더 유리한 결과를 얻고 있다면, 이는 여교수들의 이런 희생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대학 내 여성 고용의 질도 그리 높지 않다. 여성들의 경력 단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은 돈과 법, 제도를 통해 하루아침에 후딱 하는 것보다는 대학을 통하는 게 제일 빠르다고 생각하는 이혜숙 소장. 그는 이런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에서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축복이다.

 

 

눈앞에 당면한 교수평가 이런 것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걸 놓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한 학자이자 여성으로서 긴 시간의 연단을 거쳐온삶의 지혜라고 해야 할까. “사실 연구도 중요하다. 미래세대를 키운다는 게 새로운 지식 창출을 통해 뭔가를 리드해나가는 일인데, 지금 대학이 그런 역할을 그전만큼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대학이 미래세대를 키우는 일보다 더 큰 역할이 있겠냐고 반문했다. “지금 대학에는 여학생이 절반을 넘어섰다. 이공계도 점점 여성인력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남자 혼자 벌어서는 살기 어렵게 되지 않았나. 남학생과 똑같이 여학생들의 커리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런 고민이 시작될 때 문제가 풀리기 시작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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