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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사실성과 타당성』(위르겐 하버마스, 나남 刊)
<깊이읽기> 『사실성과 타당성』(위르겐 하버마스, 나남 刊)
  • 홍윤기 / 동국대·철학
  • 승인 2000.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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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이처럼 난삽하고 두꺼운 책의 번역서를 앞에 놓고 해야 할 일은 우선, 축하하는 것이다. 1992년 6월 하버마스의 정년퇴임과 맞물려 출간된 책이니 얼추 8년만에 20세기말을 대표하는 사회사상의 역작 하나를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노년에 든 학자를 거의 6년 동안 이 대규모 연구작업에 매달리게 했을까.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시민사회가 고도로 분화된 국가일수록, 정당하지만 서로 충돌하는 수많은 의견들이 여러 곳에서 분출되는 법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대의제라는 정치제도에 의해 비교적 순탄하게 처리되지만, 적지 않은 주장들은 그런 처리과정에 반영되지도 못한채 사장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제도적으로 경직된 민주주의 정치체제 자체를 혐오하는 각종 급진 세력이나 시민운동이 등장한다.
이런 움직임이 그에 값하는 주목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고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통치불능의 정치공백 현상이 나타난다. 더구나 서유럽에서처럼 대륙 차원의 정치통합이 현실화되면서 기존의 국가기구가 독점하던 주권 자체가 현저하게 상대화될 경우,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사회통합의 기축이 큰 동요를 일으킨다. 하버마스의 문제는 바로 이렇게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분출되는 각종 정당성 요구들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상호합리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접선을 모색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변이론(Diskurstheorie)에 입각해 추출된 그의 ‘타당성’ 개념이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각종 주장들의 정당성 정도를 측정하고 그 경계를 규정하는 분석 개념으로 전화되는 지점도 이곳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제기되는 현장의 의사소통 밀집도와 심급에 따라 정당성에 있어서 질적으로 다른 형태의 타당성을 획득한다. 시민사회의 핵심인 생활세계에서는 체감적으로 생활상의 욕구와 가장 밀접한 주장이 제기되지만, 바로 그 직접적 확실성 때문에 논변절차의 보편적 집행정도는 가장 떨어지는 타당성을 획득한다. 이런 생활상의 욕구들을 특수이익에 따라 고전적으로 결집시키는 각종 사회조직과 여론 매체를 통해 공중 영역이 형성되고 사회세력 분포상의 강도에 따른 공적 의견이 형성된다.
그러나 ‘국가시민’ 전반에 타당성을 갖는 구속력있는 최종결론과 그 집행은 ‘법’의 제정을 경과해 국가적·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렇게 보면 고도로 발전된 민주사회는 시민들이 영위하는 각종 생활권을 다양한 의사소통절차를 통해 연결하고, 이 연결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논변의 심의를 진행시키는 그 자체 거대한 의사소통 네트워크로 규정된다. 그런데 국가기구가 그 자체의 제도적 협애함 때문에 진정 긴급한 시민적 욕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때, 민주국가 최후의 보루인 시민사회에서 시민불복종을 비롯한 각종 항의운동이 제기됨으로써 전체로서의 헌법질서에 생동하는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제 정치권력은 특정 계층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순환하는 것으로 부각된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실증가능하고 실현가능한 구도를 제시하려는 이 책의 번역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상의 몇 가지 생소함은 ‘옥의 티’로 지적될 수 밖에 없다. Deliberation이라는 말은 우리 학계에서 이미 ‘審議’라는 번역어로 정착됐음에도 역자가 왜 굳이 ‘討議’라는 말로써 개념적 긴장을 죽였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독일어로 부기까지 한 문장이 전적으로 오역이었다는 것은 과중한 작업이 주는 피로감의 소산이라고 양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프레게 논리철학 명제론에서 ‘관념’이라고 번역되는 Gedanken 또는 thought 같은 전문 개념들이 ‘사상’이라고 과잉번역되었다고 지적하면, 사회학자들의 번역에 대한 철학자의 시샘이라 비난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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