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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학문과 교수채용
융합학문과 교수채용
  •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 승인 2014.05.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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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 허남린 논설위원
교수채용에 있어 전공점수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직도 세월이 멈춰있나 하고 생각했다. 이야기인즉 교수를 채용하는데 있어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동일한 학과출신의 응모자를 우대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한국사 교수직에 응모하려면 학부에서부터 일관되게 한국사를 전공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한국인이 공유하는 ‘한국인의 상식’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곳의 상식이라는 것도 국경을 넘고 다른 문화권에 가면 맥을 추지 못한다. 북미의 인문학에서는 묘하게도 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과거에 어떠한 전공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따라 점수를 더 주고 시작하게 하는 경쟁은 물론 없다. 하지만 학부에서부터 동일 전공을 변함없이 해 온 사람은 교수채용에 있어 많은 경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여기에는 그렇게 좁게 살아와 복잡한 인간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전제가 깔려있다.

사회학을 했다가 인류학에 빠지기도 하고 예술론으로 석사논문을 썼다가 박사과정에서는 정치사로 학위논문을 쓰고 교수직에 응모했다면 십중팔구 큰 주목을 받는다. 실제로 여러 영역을 거쳐 온 사람이 교수로 채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 예컨대 사회학, 인류학, 예술론, 정치사는 서로 융합돼 연구자에게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근래의 인문학의 화두는 ‘인터디시플리너리’ 혹은 ‘멀티디시플리너리’ 연구다. 이러한 용어가 어떻게 한국어로 정확하게 번역될 수 있는지 필자는 자신이 없다. 학제간 융합연구 혹은 다분야적 접근연구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동과 문화는 극히 융합적인 것으로 한 학문분과의 시각으로는 이해와 분석에 한계가 분명 있을 수밖에 없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의 논문이라 하더라도 이를 읽으면 무언가 절반 정도는 비어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분석대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역으로 이러한 설명을 거역하며 치밀고 올라오는 질문도 만만치 않다. 좁은 잠망경으로 바라보고 파헤치는 글일수록 그러한 불만은 더욱 높아간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인간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 국가는 그 복잡하기가 말할 나위없다. 학문이 인간사의 궤적과 전개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라면 그 통로의 도구는 단순해서는 땅을 팔 수가 없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비슷한 경험과 같은 훈련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그것이 역사학이든 문학이든 철학이든 비슷한 이야기에 그냥 거기에서 거기로 끝난다는 반성에서 융합학문의 목소리가 커졌던 것이다.

전공점수제와 융합학문의 기치는 정반대의 방향에 서있다. 양끝 모두 나름의 상식에 기반하고 있지만, 한쪽에서의 상식은 다른 쪽에서는 쉽사리 몰상식이 된다. 융합학문을 이야기한다면 전공점수제를 버려야 하고, 전공점수제를 고집하려면 융합학문을 폐기처분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하건 그것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가 동시에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억압내지는 폭력으로 행사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공이 무엇이지요? 이런 질문은 20세기의 질문이다. 능력여하에 따라 연구의 대상과 방법은 언제나 가변적일 수 있다. 능력을 열어주고 격려하는 그러한 가변의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학문의 전개를 환영하는 풍토, 그것이 필자가 북미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고무적으로 느끼고 있는 점이다.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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