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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 讀法이 불편한 이유
그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 讀法이 불편한 이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5.20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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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는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에서 무엇을 봤나?

 

▲ 유홍준 교수가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을 담은 사진 중 최고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사진”으로 꼽은 오가와 세이요의 목조미륵반가상 흑백사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를 일약 스타로 만든 책이다. 이 책이 새로운 형태의 국토순례 개척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심미안을 깊게 걸러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유 교수의 ‘답사기’는 국내편 1~7권, 일본편 1~3권으로 이어졌다. 책이 출간될 때마다‘답사기’를 답사하는 진기한 문화풍경도 연출됐다. 최근 그가 펴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 3 교토의 역사』(창비 刊)도 그런 全作들의 경로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일본편 3 교토의 역사』의 페이지를 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홍준’이라는 문화 심미안을 단박에 사로잡은 일본 교토의 광륭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미륵반가상이다. 일본 국보 제1호이기도 한 이 미륵반가상이 어째서 그를 사로잡은 것일까. 교류지 목조미륵반가상은 유홍준 이전에 이미 내로라하는 사상가, 작가, 예술가들의 심혼을 울렸다. 칼 야스퍼스가 그랬고, 일본의 불상 사진 전문가 오가와 세이요도 그랬다. 유홍준 교수의 시선은 어떨까. 그의 시선은 목조미륵반가상의 유려하면서도 담백한 선을 따라간다.


“지그시 감은 눈과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보면 그것은 바야흐로 法悅을 느끼는 듯 성스럽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평온한 모습일 수 있을까. 몸에 어떤 장식도 가하지 않은 裸身이다. 우리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만 해도 목덜미에 둥근 옷주름을 표현해서 法衣가 몸에 밀착돼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 불상에선 가슴 부분이 가벼운 볼륨감으로 드러나 있고 목에 세 가닥 목주름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를 三道라 한다. 본래는 금분을 발랐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현재의 매끈한 나무 질감이 더욱 조형성을 느끼게 한다.”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이 쓰고 있는 모자도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같은 ‘三山冠’이다. 두 미륵반가상의 친연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 교수의 시선은 다시 하반신으로 이어진다. “하반신은 법의 자락이 굵은 주름을 지으면서 리드미컬하게 흘러내리고 있어 상반신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곧게 뻗은 왼쪽 다리만은 맨살로 나타내어 상반신의 매끄러운 질감이 연장된다.” 유 교수는 이 ‘매끄러운 질감’을 두고 “참으로 슬기로운 재질감의 표현이다”라고 읽어낸다.

▲ 일본 국보 제1호인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왼쪽)과 우리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오른쪽). 유홍준 교수는 친구인 역사학자 안병욱의 견해를 들어 우리 국보 83호가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즉 두 불상의 턱에 괸 손가락, 발가락 등을 보면, 법열의 희열을 거기에까지 은은하게 반영한 것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이라는 설명이다. 즉 디테일 면에서 두 명작이 갈린다는 지적이다.


어쩌면 이 사찰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이 목조미륵반가상 앞에 서면 佛像의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형식미에 흠뻑 젖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래전 칼 야스퍼스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다. “불상이면서도 인간의 모습이 느껴져 여기서 우리는 신과 인간의 절묘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에 대해서는 많은 예찬이 있었다. 유 교수는 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글로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1945년 가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에 왔을 때 이 불상을 보고 남긴 찬사를 꼽았다. 시노하라 세이에이의 『패전의 저편에 있는 것(敗戰の彼岸にあるもの)』(弘文堂, 1949)에 실려 있는 구절로, 광륭사 안내서가 관련 대목을 재수록한 모양이다. 유 교수는 이를 요약해 실었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모델의 조각들을 접해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상, 로마 시대의 뛰어난 조각,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한 조각들도 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에게는 아직 완전히 초극되지 않은 어딘지 지상적인 감정과 인간적인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성과 미의 이데아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의 신상도 로마시대 종교적인 조각도 인간 실존의 저 깊은 곳까지 도달한 절대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미륵반가상에는 그야말로 극도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돼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몇십년간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화답사기의 고수는 이렇게 야스퍼스의 글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이 대목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패전 이후의 일본에서 한 실존 철학자가 ‘평화의 이상’을 찾아낸 것은 분명 흥미로운 대목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 중심지인 쿄토에 위치한 목조미륵반가상의 절대 미소가 그 어느 시대 인간들도 구현하지 못한 평화의 이상을 담아내고 있다면, 그런 불상과 예술을 품고온 일본이 어째서 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평화의 대척점에 서게 됐는지, 그럴 때 예술(미륵반가상)과 현실 욕망(천황제 군국주의)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유홍준이라면 읽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최고도로 표현한’ 목조미륵반가상의 제작 국적을 떠나, 교토라는 일본역사의 중심지에 미륵상을 두고서도 죽임의 戰亂을 향해 치달아갔던 한 시대의 폭력성을 외면한다면, 답사기는 그저 공중을 밟는 逃路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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