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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과연 지배적인 地문화가 존재했을까?
19세기에 과연 지배적인 地문화가 존재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5.13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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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피츠 시카고대 교수의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비판

 

좌파의 고민을 담은 <뉴레프트리뷰>(2014/5, 도서출판 길) 최신호는 특집으로 ‘21세기 자본주의론’에 「21세기의 계급」 등 6편의 논문을 수록하는 한편, ‘지역쟁점’에는 「소용돌이 속의 유럽」 등 5편의 논문을, ‘문화와 예술’에는 「미래가 없는 좌파를 위하여」 등 2편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다. 서평란에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 제4권에 대한 서평과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처음 5천 년』을 다뤘다.

 


한국 편집위원들을 대신해 홍기빈은 편집자 서문에서 “21세기 초입에 들어선 오늘, 미래는 여전히 뿌옇고 현재 또한 제대로 포착되지 않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의 틀과 개념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새로이 벼려내야 하며 …… 훗날 되돌아보면 틀림없이 참으로 어설픈 삽질이었다고 비웃게 될 억지 가설과 조잡한 개념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모색 작업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종내 “실패하고 또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좌파 학자들, 이론가들, 연구자들이 처한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뉴레프트리뷰>에서 의외로 흥미롭게 읽히는 글은 제니퍼 피츠 시카고대 교수(정치학)의 서평이다.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 제4권을 겨냥한 그녀는 이 책이 19세기에 폭발적으로 확장된 세계체제 전반을 다루기보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하나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의 출현에 집중한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홍기빈은 이러한 제니퍼 피츠 교수의 비판에 대해 “어쩌면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결국 모든 정치 담론은 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보수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고 그저 뜨뜻미지근하게 우리의 안온한 일상과 정확하게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자유주의’로 수렵되게 돼 있는 게 아닐까”라고 부연한다. 월러스틴을 비판하는 제니퍼 피츠 교수가 사용한 匕首는 글의 제목이기도 한 ‘자유주의적 地문화’(월러스틴에 의하면, 地문화는 세계체제를 거쳐 매우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가치와 관계된다)다. 그녀는 월러스틴의 무엇을 문제삼았을까.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The Modern World-System)』의 첫 권은 1974년에 나왔으니, 40년의 시간을 헤쳐 온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니퍼 피츠 교수도 이 점을 먼저 인정하고 들어간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시리즈 『근대 세계체제』는 그것이 출간되고부터 40년에 걸쳐 우리 시대 지구적 질서의 구성을 분석하는 데 바쳐진, 논쟁적이고 폭넓으며 생산적이었던 그의 작업의 핵심이었다.”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 첫번째 권은 16세기를, 두번째 권은 1600~1750년을, 세번째 책은 18세기 중반에서 1860년대까지를 다룬다. 이렇게 해서 이들 시리즈를 관통하는 월러스틴의 주된 생각은 “북서 유럽의 핵심에서 세계경제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가 최고 수위에 이르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니퍼 피츠 교수도 이렇게 읽어낸다. 그렇다면, ‘장기 19세기’를 다루는 책에서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 제니처 피츠가 좀 더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대목도 바로 이곳이다.


그녀가 비판의 과녁으로 삼은 제4권의 제목은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캘리포니아대출판부, 2011)다. 일단, 제니퍼 피츠 교수는 월러스틴의 제4권이 19세기 자유주의를 정치 경제적 전망에서 접근하다 보니 “산업주의의 성장, 노예무역 또는 식민지 팽창의 역할에 대한 고려가 공백으로 남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19세기 자유주의에는 그 추동력이 지배자의 정치적 의지인 듯 보이는 19세기 유럽의 외교사와 지성사처럼 대단히 낡은 성격이 부여”되고 있다고 짚어냈다. 제3권에서 월러스틴이 호명한 주제는, “이미 잘 자리잡고 있던 체계의 물질적 토대와 더불어 19세기의 핵심적 발전은 知的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이었다. 즉 영국과 프랑스에서 중도적 자유주의가 헤게모니적 地문화로서 발전하고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니퍼 피츠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런 질문을 잇달아 던진다.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것처럼 19세기에 지배적인 地문화가 존재했을까? 어떤 것을 하나의 地문화로 간주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석적으로 유용한 범주일까? 그리고 이러한 地문화는 월러스틴이 주장하고 있듯이 그것의 형성에 크게 앞서는 경제적 발전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월러스틴은 『역사적 자본주의』(1983)에서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정사정없이 기괴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궁극적으로는 무분별하고 모순적이고 난폭하게 파괴적인, 끝없는 축적의 명령이라고 역설했다. 이 대목을 환기한 제니퍼 피츠 교수는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전체에서 자본주의의 地문화로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이러한 핵심 특징들을 정당화하는 데 봉사했는지 또는 자유주의의 전파자들이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의도했는지는 명확하게 해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고 월러스틴을 비판한다.


근대정치사상, 특히 18세기와 19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상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주장은 명쾌하다. “19세기의 진정한 地문화로서의 자유주의를 설명하려면(또는 심지어 서유럽의 대변자 가운데서 그것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자유주의의 초국민적·제국주의적, 그리고 심지어 지구적 성격에 관심을 가질 것이 요청된다. 월러스틴은 체계의 地문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유럽 부르주아지가 전개한 좌파와 우파 라이벌들과의 정치적 투쟁을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정하는 듯하다.” 일례로 “월러스틴은 제국주의적 팽창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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