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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오지 찾아 떠나는 겨울여행
[테마] 오지 찾아 떠나는 겨울여행
  • 교수신문
  • 승인 2001.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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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02 16:47:45
안치운/ 편집기획위원·서울대 강사

산속의 밤길에서 맛보는 ‘길’이란 단어의 부드러움

서울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 속 폐교된 분교에 갔습니다. 볼 것이 많았습니다. 도착해보니 바람은 멎었고, 길가에는 내린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작은 운동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뭇거뭇한 흙이 발에 밟혔습니다. 사람의 발자국이 없는 흙 위에 초록빛 이끼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흙과 이끼가 선명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아득합니다.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은 다들 떠났습니다. 지금은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임도라는 길이 생겼지만 재작년만 해도 길은 거의 다 오솔길이었습니다.
오후 4시쯤 햇살이 산자락에 그대로 묻어있었습니다. 처음 학교에 들어서면 크게 보였던 초가집과 교실 한 칸이 시간이 흐르면서 금세 작아져 보입니다. 눈을 아예 감으면 십여 년 전 이 산 속 분교를 다녔던 아이들의 기척이 들리는 듯 합니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은 커서 청년이 되었을 그들은 여기에 언제 다시 올 수 있는지요. 시간이 풍화되면 아이들은 어른이 될 터인데… 그렇습니다. 산 속 오지마을의 폐교는 모든 것이 증발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흙과 이끼의 조화

아무도 살지 않는 어둔 산길을 무턱대고 올라온다는 것은 지도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예감 같은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길로 가면 나온다, 맞을 것이다,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와 같은 예감 말이지요. 믿었던 것은 사실 지도가 아니라 가볍고 부드러운 길이라는 단어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증발되는 것을 막으려면 우선 불부터 지펴야 했습니다. 초가집과 교실을 떠받치고 있는 구들과 흙을 따뜻하게 해야 했습니다. 운동장 끝자락에 통나무들은 많았습니다. 나무 하나를 부둥켜안으니 다리가 벌벌 떨렸습니다. 나무를 옮겨와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조금씩,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른 나무를 다시 도끼로 내려찍을 때 나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얽어매고 있었던 나무 속들이 떨어지는 아픈 소리였습니다. 단 한번, 아주 짧게, 짝. 그 때마다 나무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톱질과 도끼질을 번갈아 하다가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기도 합니다.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나무를 좀 더 길게 나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불을 찾아서

군불 때는 방이 따뜻해지고,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자 폐교는 지복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교실이 살아났고, 초가집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빈터로 있었던 폐교가 사람들이 모이는 행복한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평화로운 폐교. 마침내 쓸쓸하게 증발하고 있는 폐교가 스스로의 어둠을 모두 삼켜버리고 도시를 떠난 우리들에게 넉넉함을 주는 해방의 바다로 바뀌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이런 곳에 오면 이런 불가해한 체험이 되살아납니다. 내 몸 안에 오솔길이 생깁니다. 맑고 시린 계곡 물이 쉬지도 않고 흘러갑니다. 폐교가 처음에는 낯설게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산 속 조그만 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숨결이 속삭이는 것을, 그것이 내 몸에 겹쳐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살지 않는, 혼자 있기에는 적막감이 감도는 이곳이 내게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처음 이런 곳에 오면 어중간해집니다. 자연과 인공의 사이. 누구나 인공을 싫어하고 자연을 좋아하지만 자연 속으로 침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자연은 무명의 지평입니다. 그곳에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연은 규정 없는 타자의 개입을 하락합니다. 그래서 먹을 것은 손을 뻗으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태울 나무가 모자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결을 내어 장작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족함과 조급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더러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불은 여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계곡 쪽에서 하얀 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길과 산책

흔히들 호텔의 수준에 따라 별을 붙여놓습니다. 하나, 둘, 넷. 동아실 폐교는 하늘의 별이 무진장 많은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임도를 따라 올라 계곡 길로 내려오는 산책을 했습니다. 화전민이 살던 집, 심마니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 산자락에 붙어있는 비단길과 같은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시간의 세례를 받는 것과 같았습니다. 길을 만들었고, 길 위로 걸었던 무수한 시간의 세례를 다시 받고 싶었습니다. 길은 무엇인가를 향해 흐르고 있었습니다. 임도야 차들이 다니지만, 계곡 위로 난 오솔길은 희미한 흔적으로 알아낸 것이지만 소멸을 향해 무너져 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길은 그냥 정지한 채 있었습니다. 우리가 밟고 가기 전까지는. 이런 길은 도시에서 결코 밟을 수 없는 길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모든 것을 안에 품을 수 있는 아주 투명한 길. 아,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을 것입니다. 더 없이 매력적인 걸음걸이, 긴 억새풀이 출렁이는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오는 위태로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자세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길이 나무를 버리지 않고, 나무가 길을 앗아가지도 않아 아름답게 연출된 길 언저리에 나는 그냥 눕고 말았습니다. 길을 걷다가 상쾌해져 길이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산 속에 살면서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니 그런 공간이 있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폭신폭신한 그 길을 참 좋아합니다. 봄이 되면 그 길에 풀꽃이 출렁거릴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즐겁게 놀던 일을 추억하는 기쁨뿐입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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